[회 고 록]

 

 

박달은 단 한 번도 군복을 입은 적이 없었고 나와 한부대에서 싸운 적이 없었다. 내가 백두산 지구에서 박달을 만난 것은 몇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가 우리를 찾아온 것이 여러번이었는데 둬번은 내가 자리를 뜨고 없어 만나지 못하였다.

한두차례의 상봉으로 생면부지의 상대를 속속들이 파악한다는 것은 헐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과 같이 나와 박달사이의 호상이해는 첫번째 상봉만으로도 상당히 두터운 것으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순과 마찬가지로 박달도 세파에 때묻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파벌에 속하였던 적도 없었고 주의자행세를 하며 거드름을 부린 적도 없었다. 박달은 내가 길림시절에 많이 만나본 김찬이나 안광천과 같은 유행식 운동자가 아니었다.

그는 산골사람다운 농민적인 순박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말과 몸가짐이 세련되고 식자도 풍부하였다. 첫 상봉으로도 무게가 있는 사나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다. 자기식으로 종래의 여러 운동에 대하여 비판도 하고 민족의 출로를 두고 걱정도 하였다. 그는 종래의 낡은 운동방식을 타파할만한 지도자를 찾지 못해 흥남에도 가고 단천에도 가고 간도땅에도 갔었다고 한다.

박달이 자기를 이끌어줄만한 영솔자를 찾아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대로 준비된 국내혁명가들을 찾아내기 위해 각방으로 노력하였다.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하는 데서 우리가 중요하게 내세운 전략적 과업은 한편으로는 국내에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총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믿음직한 책원지, 비밀거점을 꾸리는 것이었으며 다른편으로는 강력한 정치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을 마련함으로써 자력광복을 위한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국내에 강력한 정치적 역량을 꾸리는 사업은 조국광복회망을 확대하여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굳게 묶어세우는 것과 함께 국내에 강력한 당조직망을 꾸림으로써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항일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핵심역량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 앉아 벌이려고 하는 모든 정치적, 군사적 활동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적인 중심고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국내혁명운동을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처음부터 영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는 우리가 발을 붙이고 혁명을 심화시켜 나갈 수 있는 일정한 조직적 기초도 있었고 일제의 군도와 곤봉 맛을 본 준비된 정치적 역량도 있었다. 노조와 농조를 비롯하여 전국도처에서 우후죽순처럼 자라난 계층별 대중조직들, 그 조직들을 항일에로 인도해 가는 검열된 투사들, 거듭되는 실패와 우여곡절 속에서 단련되고 세련되고 강해진 인민, 좌절과 실패를 체험할 때마다 가슴을 치며 피눈물로 기록해 놓은 투쟁의 교훈…     그 모든 것은 국내혁명운동을 새로운 전략과 전술에 기초하여 가일층 심화발전시킬 수 있는 튼튼한 밑천이었다.

국내혁명운동이 거둔 업적과 경험을 존중시하고 그 성과를 토대로 하여 기성운동을 수습하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국내혁명운동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선택한 자세였고 방침이었다.

우리는 1920년대말과 1930년대 초부터  「ㅌ.ㄷ」와 조선혁명군에서 육성된 우수한 공작원들을 북부국경지대와 국내깊이에까지 파견하여 정치군사적 지반을 닦기 위한 일정한 준비사업을 선행시키었다.

국내혁명운동을 더 높은 단계에로 치켜올리자면 조선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적인 지도세력으로 등장한 인민혁명군의 조선경내에로의 본격적인 정치군사적 진출과 국내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방조가 필요하였다.

사실상 실패와 좌절만을 거듭해온 국내혁명운동은 새로운 지도와 노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동의 상층부는 파쟁으로 혼란되어 있었으나 하층의 선각자들과 인민들은 혁신적인 노선과 지도를 받아들여 결사전에 나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당재건에 열을 올리던 투사들도 지하와 감방에서 자신들이 엮어온 실패작들을 돌이켜보며 출로를 찾으려고 암중모색하였다.

우리 앞에는 이러한 요구에 민감하게 호응할 수 있는 실천대책이 필요하였다. 그 대책 중에서도 선차적인 것이 바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과제를 실행하자면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이제순과 같은 형의 견실한 혁명가들을 찾아내고 그들과의 공동노력을 통하여 조국광복회망을 빨리 늘리고 온 민족을 반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만 하였다.

그런 적임자로 물색된 것이 박달이었다.

우리에게 박달을 소개한 사람은 이제순이었다.

『박달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는 칼날 위에라도 올라서는 사내대장 부입니다. 이론도 굉장합니다. 한번은 사상가랍시고 으시대는 단천내기 사자머리 하고 무슨 논쟁이 붙었는데 그 사람의 코를 아예 납작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함남 북을 개척하자면 박달을 만나야 합니다!』

나는 이제순이 한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나보지 않고서는 그 말을 다 믿기가 어려웠다. 사실 요란한 소문을 듣고 만나본 명사들에게서 우리는 기대와 달리 얼마나 큰 실망만을 받아안았던가.

주의주장에는 관계없이 지난날 내가 만나본 이러저러한 명사들 중 적지않은 사람들은 자기로서의 분명한 탁견이 없었고 사고와 실천에서 참신성이 부족하였다.

박달로 말하면 내가 길림시절에 만나본 안창호, 김좌진, 이청천, 오동진, 손정도, 심용준, 현묵관, 현하죽, 고원암, 김찬, 안광천, 신일용, 서중석과 같은 일류명사는 아니었다. 박달에 대해서는 기껏해서 지방순사나 고등계 형사들이 살피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 소박한 시골초부와 같은 사람이 결국은 우리 혁명에 큰 자국을 남긴 거물로 솟아올랐고 내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막역한 벗으로 동지로 되었다. 이제순의 말에 의하면 박달의 본명은 박문상이라고 하였다. 박달나무와 같이 단단한 사람이라고 하여 이웃들이 『 박달』 , 『박달』 하고 불렀는데 그것이 그만 박문상의 별명이 되고 나중에는 이름으로까지 고착되었다고 한다.

박달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태생이었다. 아버지가 명천에서 정어리 공장을 운영하였다고 하니 가세는 그닥 빈한하지 않았던 모양인데 학력만은 보통학교 졸업정도라고 하였다. 그는 11살에 신랑이 되고 16살에 아버지가 경영하는 정어리 공장에 취직하여 월급쟁이 회계원이 되었다. 아마도 그의 부친은 아들을 일찍이 자수성가시키려 했던 것 같다.

박달은 조혼한 것이 부끄러워서 동무들에게 신랑이 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점심식사하러 집에 들어왔다가도 아내가 혼자 있으면 밥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방안을 오락가락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성미가 호방하고 인정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주색을 즐겨 첩을 두었다고 한다. 그래저래 박달을 낳은 어머니는 아버지한테서 따돌림을 당한 것 같고 아들은 어머니를 몹시 동정했던 것 같다.

『내가 제일 미워한 것은 첩을 얻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인가 박달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일생동안 첩을 둔 아버지의 슬하에서 어머니가 당하는 고통을 감수하며 축첩 제도의 쓴맛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해방후 우리가 법으로 축첩제도를 폐지해 버린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하였다.

축첩제도로 하여 어머니가 당한 불행은 일생동안 박달을 괴롭힌 근원으로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별로 받아보지 못하고 고독하게 살아온 어머니의 인생에서 교훈을 찾고 주색과는 담을 쌓으면서 자기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위인 아내에게 한평생 변함없는 순정을 바쳐왔다.

박달이 다음으로 경멸한 것은 깍쟁이들이었다. 그는 직급과 직업과 성별에 관계없이 깍쟁이란 깍쟁이는 죄다 미워하였다.

『나는 인색한 사람들만 보면 하루종일 밥맛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을에서 박달을 만나던 1957년은 그런 한담을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좋아진 때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의 생활에서 가장 질색해 하는 것이 개인주의, 이기주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달 자신은 인덕이 높은 사람이었다. 통속적인 표현을 빈다면 인정이 남아돌아가는 사람이었다. 감자를 수확하는 계절이 올 때마다 그는 자기집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어들이었다. 금년 감자맛이 꿀맛인데 한 번 먹어보고 갈 생각이 없소 하고 잔뜩 구미가 동하게 해놓고는 슬쩍 팔을 잡아당기곤 하였다. 감자를 심지 못한 집에는 감자떡을 쳐서 갖다주게 하였다.

박달과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만일 부자였다면 굉장한 자선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돈은 없지만 이웃을 돕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박달은 소학교를 마친 다음 독학으로 구학도 공부하고 중학강의록도 보았다. 박달이 얼마나 근면한 독학가였는가 하는 것은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 불구의 몸으로  「 동의보감」을 전부 독파했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능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혜산사건」때 박달의 집을 수색한 경찰들은 깜짝 놀랐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  「조국광복회 창립선언」을 비롯하여 「사회주의대의」,  「사회진화론」,「식민지문제의 기본지식」, 「무산계급의 부인운동」 ,  「실업반대투쟁선언」 ,  「사회주의 사전」「제7차 국제당대회에서의 왕명의 연설」, 「중국공산당 창건 15주년 기념」,  「조선문제에 관한 테제」,  「당원기본상식」과 같은 사회주의 서적들이 무데기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걸칠 것이 하나도 없는 집이었는데 책만은 부자였다.

박달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자기는 별로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많지 못하니 문맹자로 여기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워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겸양의 뜻이었고 실은 맑스주의 혁명이론 일반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지식을 뽐내지 않았고 지식으로 그 누구를 압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무슨  「영도권」 을 잡아보려는 것과 같은 야심은 품지도 않았다. 그는 물욕도 없고 직위욕도 없는 검박한 인간이었다. 바로 여기에 참된 인간, 참된 애국자, 참된 혁명가로서의 박달의 참모습이 있다고 생각한다.

박달은 언제나 자기를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 세웠고 그래서 누구인가가 자기네를 손잡아 옳은 길로 이끌어주기를 고대하였다.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할 때에도 그는 그 단체의 포괄범위를「갑산」이라는 지방적인 것으로 한정하였고 공작위원회라는 명판을 통하여 그 잠정적인 성격도 명백히 하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장차 조선공산당이 창건되면 그에 복종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고 그 때가서 조직의 이름을 다시 적당한 것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박달이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한 것은 반일투쟁을 이끌어줄만한 지도자를 찾지 못한 조건에서 그들 자신의 힘으로 지방적인 테두리에서나마 먼저 조직을 뭇고 운동을 벌여보자는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박달이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하던 과정은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갑산지방의 일부 사회운동자들은 군경들의 폭압에 겁을 집어먹고 투항주의적 입장에 빠져있었는데 그들은 이 원인을 당중앙기관이 없는데서 찾으려고 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정당화하였다.

『갑산군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반제투쟁을 부추겨주거나 부채질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어 새로운 노선을 내놓고 그 노선에 따라 갑산에서의 운동을 영도할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충실하는 것이며 중앙집권제원칙을 존중하는 것으로 된다.』 

박달은 이런 입장을 혁명에서의 도피라고 비판하면서 갑산군에서 일어나는 자연발생적인 운동을 우리가 조직화하여야 하며 그것을 전조선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 앞으로 공산당이 조직되더라도 당중앙이 우리 지방에서 일어나는 운동에 대한 영도를 보다 쉽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갑산공작위원회는 이처럼 좋은 시기가 도래하기를 앉아 기다리기만 하거나 경찰의 주목을 피하여 타지방에 도피해서 제 한 몸이나 부지하려는 자들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속에서 조직되었다.

박달은 있을 수 있는 적의 탄압으로부터 갑산공작위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부조직들의 명칭을 정우회, 전진회, 반일회 하는 식으로 각이하게 달았다. 대중계몽을 위해서는 진흥회나 자위단과 같은 어용단체들도 서슴없이 이용하였다. 이 단체들의 간판을 가지고 야학회나 운동회, 조기회 같은 것을 할 때 속내를 모르는 경찰들은 이제는 갑산촌뜨기들도 충실한 황국신민이 돼가는가보다고 흐뭇하게 생각하였다.

박달은 한 달에 한 번씩 소집하기로 되어있는 공작위원회 하부조직책임자들의 모임을 가질 때마다 축구경기를 조직하였다. 군중이 모인 다음 시합을 붙여놓고는 뒤에 돌아앉아 슬금슬금 회의도 하고 분공조직도 하고 할 일을 다하였다. 제사, 결혼식, 생일놀이, 환갑잔치도 조직원들과 조직책임자들의 비밀모임을 하는 계기로 이용하였다. 합법적인 가능성을 이용하니 조직을 위장하는데도 좋았고 조직활동도 활발히 벌릴 수 있었다.

공작위원회 성원들은 이러한 합법적 활동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일제경찰, 주구들과의 관계를 매우 능란하게 가졌다. 공작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대부분의 조직성원들은 일제의 어용단체들과 말단행정기관들에 들어가  열성분자 로 활동하였다.

이것은 일제 군경이나 주구들에 대하여 노골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무조건적인 대결자세를 취하던 신간회, 노총, 청맹, 적색노조, 적색농조의 투쟁에 비하면 매우 대담하고 혁신적인 조치였다.

국내투사들 가운데서 박달이 맨처음으로 응용한 이 외유내강한 위장전술이 크게 은을 내었다.

경찰기관이나 자위단이나 그 밖의 관공서와 농촌진흥회, 소방조, 학교조합, 산림보호조합 등의 단체에서 촌장이나, 구장이니, 무슨 장이니 하는 감투를 쓰고 심부름을 고분고분 들어주는 척하는 것은 적들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시키는데도 좋았고 적의 내부를 속속들이 파악하는데도 좋았으며 적의 주위에 집결되어있는 세력을 와해시켜 우리편으로 끌어당기는데도 좋았고 인민들이 들볶이지 않도록 하는데도 좋았다. 박달은 갑산공작위원회 책임자 겸 그 위원회의 정치부와 쟁의부를 담당한 만만치 않은 혁명가였지만 적들이 관할하는 공공단체들에도 들어가 있었다. 그는 보천면 신흥리 1구의 농촌진흥회 부회장, 1구 일신서당계의 계장, 자위단 부단장, 운흥면 대오시천리 소방조 소방수 등 주요한 자리들을 버젓이 차지하고 있었다.

「혜산사건」당시 1차로 감옥에 잡혀갔던 사람들 중 63명이 자위단원으로 되어있었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그들이 얼마나 영활하게 일제의 어용기관과 단체들을 이용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 63명 가운데는 진흥회 서무부장, 자위단 5가조장, 산림보호조합 평의원, 산농지도구 지도위원, 화전측량총대표, 중견청년강습회 수강생, 서당학무위원, 간이학교 평의원 등 별의별 직함이 다 있었다.

갑산공작위원회는 이와 같은 합법적인 방법과 비합법적인 방법을 능숙하게 배합하면서 농촌지역의 특성에 맞는 구호, 예를 들면 소작료 인하, 화전자유개간, 부역반대, 고리대반대, 아마강제재배반대, 소맥강제재배반대 등의 구호를 들고 투쟁을 힘있게 벌이었다.

얼핏보면 경제투쟁 일변도로 나간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지만 그 구호들에는 아마강제재배반대나 소맥강제재배반대와 같은 심각한 정치투쟁의 구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갑산지구 농민들이 아마강제재배조치에 반기를 든 것은 그 작물이 군수품 원료로 이용된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마씨를 가마에 쪄서 심거나 드물게 심어 아지를 많이 치게 함으로써 못쓰게 만드는 방법으로 강제재배조치를 파탄시키었다.

어쨌든 이제순의 말만 들어보아도 우리가 하루속히 손을 잡아야 할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우리는 박달을 만나기 위한 방도를 토의하고 이제순을 국내연락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제순은 연락임무를 신속히 수행하였다. 박달이 자기에게 인민혁명군대표를 직접 보내줄 것을 요구한다는 이제순의 보고가 통신원을 통하여 나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우리와의 회견을 열렬히 환영하면서도 곧바로 밀영을 찾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그가 매우 심사숙고할 줄 아는 혁명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즉흥적인 행동을 삼가는 박달의 조심성과 용의주도성은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호기심을 더해 주었다.

우리에게는 남비처럼 쉽게 끓다가 인차 식어버리거나 바람부는대로 왔다갔다하는 경박한 사상가가 아니라 진지하고 침착하고 용의주도한 혁명가가 필요하였다.

우리는 박달이 요구한대로 당사업경험이 풍부한 권영벽을 갑산지방에 파견하였다. 그때 내가 권영벽을 통하여 박달에게 보낸 편지는 아래와 같다.

 

조국을 사랑하며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국내의 애국자동무들 앞

 

국내에서 간악한 일제원수들과 싸우는 동무들!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무장을 들고 만주광야에서 일만군경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무들과 손을 굳게 잡고 모든 힘을 합쳐서 일제를 반대하며 조국을 광복시키는 투쟁을 진행할 것을 충심으로부터 권합니다.

나는 우리의 대표를 직접 동무들에게 파견하오니 서로 만나서 사심없는 토론들을 교환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경례                                                     

김 일 성

 

 권영벽이 갑산으로 나갈 때 이제순도 동행하였다. 그들이 박달을 만난 것은 1936년 12월이라고 기억된다. 박달은 그때 처음으로 권영벽을 통하여 조국광복회가 창립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권영벽을 그에게 조선인민혁명군이 전개해온 주요활동내용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었다.

권영벽의 출현은 우리와의 연계를 열렬히 희망하는 박달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사변으로 되었던 것 같다. 권영벽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박달이 워낙 웬간해서는 자기 감정을 밖으로 내비치지 않아서  「무툴쇠」라는 별명까지 받은 사람이라는데 나의 편지를 받고서는 너무 기뻐 눈굽에 이슬방울까지 맺히더라는 것이다.

『그 동무는 즉시 장군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제기하였습니다. 사령관동지가 허락만 해주시면 아무때든지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으니 나도 박달을 만나고 싶은 욕망이 더 간절해졌다. 나는 우리 밀영에서 박달을 만나기로 작정하고 회견과 관련하여 필요한 대책을 세울 것을 권영벽에게 지시하였다.

박달은 자기대로 우리에게 오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준비란 다른 것이 아니라 압록강을 무사히 도강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살벌한 정세로 인하여 비합법적인 도강은 거의나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도강방법을 궁리하던 끝에 혜산경찰서 관하 큰웅뎅이마을에 있는 주재소 김순사를 찾아갔다.

『여보, 김순사, 당신은 장백소식을 좀 들었소?』 

박달은 주재소에 들어서자마자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었다. 김순사와 다른 여러 순사들이 눈이 휘둥그래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식말인가?』

『장백땅에 「비적」들이 많이 다니는 바람에 백성들이 다른 데로 이사해가느라고 곡식 을 마구 처분하는 통에 그 값이 매우 눅다고 하는데 콩을 한 두어차 실어다 돈벌이를 해야겠소. 눅거리콩신세를 지고 싶거든 도강증이나 한장 떼주시구려.』 

순사들은 그 말에 귀가 항아리만 해서 도강증을 떼줄 테니 자기네들의 메주콩도 실어다달라고 저마끔 부탁하였다. 도강증은 예상외로 헐하게 뗄 수 있었다. 이렇게 되어 박달은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 이제순의 집에 가닿게 되었다.

이제순이 박달을 데리고 사령부에 들어선 것은 새벽이 다 되었을 때였다.

이제순의 말대로 박달은 정말 넓은 어깨에 비해 얼굴이 작아서 어딘가 생김새가 조화롭지 못한 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외모로 보아서는 풍운아다운데가 그닥 없고 촌나무꾼 같다고 한 이제순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지켜보는 예리한 눈빛만은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퍽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박달의 첫 인사였다. 겉치레가 없는 간단한 인사였으나 진정이 느껴졌다.

그 두세마디의 투박한 말에 나는 어째서인지 그만 가슴이 뭉클해 졌다.

박달은 길주에서 유치장 신세를 질 때부터 우리와의 상봉을 꿈꾸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적의 감시도 피할 겸 조직도 확대할 겸 길주에 나타난 그는 제지공장 공사장에서 토목노동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어느날 박달은 휴지뭉테기 속에서 우리 부대가 장백지구에 진출하여 적들을 답새기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상념은 줄곧 우리에게 와있었다는 것이다. 유치장에서 풀려나온 박달은 갑산에 들어서자 우리와 연계를 지을 수 있는 줄을 잡아쥐자고 행상짐을 짊어지고 압록강변 마을들을 거의다 훑으며 돌아다녔다고 하였다.

『정말이지 오늘 이렇게 장군님을 만나보게 된건 천행이올시다!』 

박달은 반가움에 겨워 내 손을 다시 부여잡고 힘있게 흔들었다.

『박달동무를 만난 내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무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나온 후 우리를 찾아온 첫 국내대표입니다.』

『내가 무슨 대표이겠습니까. 이 갑산촌놈이… 길주나 성진이나 함흥과 같은 대처 에 가면 무슨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나같은 걸 외눈으로 보기나 하는 줄 아십니까.』 

그는 마치 몸가짐마저도  「갑산촌놈」의 분수에 맞게 가지려고 애쓰는 것 같아보이었다. 하지만 나는 박달의 그 겸허한 언행과 몸가짐에서 오히려 거인성을 느끼었다.

『대처에서만 큰 사람이 나온다는 법이야 없지 않습니까. 이제순 동무를 통해서 갑산공작위원회가 그동안 많은 반일애국활동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내에 그렇게 속이 살아있는 분들이 있다는 게 우리에게 큰 고무를 줍니다.』 

내가 몸을 녹이라고 하면서 더운물을 권하였으나 박달은 한모금 마시는둥 마는둥 하고 국내형편을 보고하겠다고 서둘렀다. 온몸이 열정으로 빚어진 탄복할만한 사나이였다.

박달과의 본격적인 담화는 그 다음날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박달이 당시의 국내형편과 갑산지방의 운동상황을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국내형편에 대하여 설명한 요점들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었다.

국내형편은 쇠퇴기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당재건을 위한 운동도 맥이 빠진 것 같고 농조운동도 한물 지나가버리었다. 운동자들은 탄압에 견디지 못해 이산저산 돌아다니며 피신생활을 하고 있다. 다시 일어날 힘이 있는가? 없다. 설사 용기를 가다듬고 다시 일어난다 해도 노선이 없다. 그저 맹목적인 싸움이야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 용기를 버리지 않고 투쟁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분파적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상해패요, 아라사패요 하는 패당들이 계속 잔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함남패, 함북패라는 것도 있고 지어는 같은 함남패 안에서도 함흥패, 홍원패, 단천패라는 것이 생겨 서로 으르렁거리며 갑론을박의 공허한 입씨름으로 정력만 소비하고 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국내혁명운동에서 제일 큰 애로는 옳은 영도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만인을 납득시킬만한 노선이 없고 그런 노선을 만들어낼만한 인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나니 전에 단천에서 농민폭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국제당에 사람을 보내어 조언과 지도를 요청하였는데 거기서도 이렇다할 소득이 없었다나봅니다. 그런즉 우리가 누구를 쳐다보겠습니까.』

박달의 말을 요약하면 국내혁명운동에서 해결을 기다리는 가장 절박한 현안문제가 노선문제, 영도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담화에서 중요하게 논의된 다른 하나의 문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명과 성격에 대한 것이었다.

박달은 나에게 좀 외람된 질문을 한가지 하겠는데 나무라지 말라고 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국내혁명가들 속에서는 김일성장군은 조선사람이지만 중국혁명을 하는 사람이고 김일성부대는 조선사람들로 꾸려진 부대이지만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 있는 부대라는 말이 돌아가는데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장군님의 직접적인 해명을 받고 싶습니다.』

이제순에게서 듣던 바대로 박달은 역시 매우 솔직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박달을 위해 비교적 긴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판보도계가 내가 인솔하는 부대를 가리켜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라고도 칭하고 있는 것만큼 국내혁명가들이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인솔하는 부대를 완전한 중국군대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으로서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동북항일연군이라는 것은 명칭 그대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는 각종 항일유격부대의 연합군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공산당 계열의 중국인 유격부대, 구국군 계열의 중국인 반일부대들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직지휘하는 조선인 항일유격대 등이 망라되어 있다. 그것은 반일항전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하여 결속된 일종의 국제적인 연합군이다.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 자기 조국의 해방이라는 같은 목적, 동북이라는 동일한 투쟁무대 또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조중 두 나라 인민들간의 친선의 감정과 공통한 처지, 이러한 것들이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자들의 무장대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무력연합을 실현하게 하였다. 연군체계는 어디까지나 자원성의 산물인만큼 항일연군은 각 민족군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존중하고 있다.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은 연군의 간판을 띠고 중국혁명을 도와주면서도 조국해방을 근본사명으로 하는 민족군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추고 조선혁명에 주력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군대가 창건초기부터 자기 조국의 해방과 자기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조선의 민족군대라는 것은 만주에 살고 있는 모든 동포들이 다 알고 있다. 우리는 중국사람들이 많이 사는 고장에 가서는 항일연군이라고 부르고 조선사람들이 많이 사는 고장에 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말한다.

한때 어떤 사람들은 1국1당제 원칙을 코에 걸고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데 대해 시비하면서 우리 민족군의 독자성과 자주적 권리를 침해하고 유린하려고까지 하였다. 그후 국제당은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 것이 1국1당제 원칙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항일연군에서 갈라져나와 독자적으로 활동하라는 조언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로 남아있기로 하였다. 따로 세간을 나면 우리에 대한 중국인민의 지지가 약화될 수 있었고 우리의 활동도 불편해 질 수 있었다. 연군을 민족별로 가르는데 대해서는 중국사람들도 바라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연군체계는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싸우는 조중 두 나라 전우들간의 혈연적 유대의 산물로서 국제적인 반제공동행동의 모범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자주적 권리가 침해 당하지 않고 또 중국사람들이 싫다고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이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가능하다면 몽고민족군대나 소련군대와도 항일연군을 형성해 가지고 싸우고 싶다.

박달은 나의 설명을 다 듣고나서 방안이 환해지게 미소를 지었다.

『아참, 그런걸 우리는 괜히 낙망했댔습니다. 김장군 빨치산이 중국군 소속의 군대라면 기대를 걸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용기가 백배해 집니다!』

『그렇다면 나도 기쁩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해서는 신심을 가져도 됩니다. 일본군은 강군이긴 하지만 결코 무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백두산을 거점으로 조선국내에로 광복전을 확대하려고 합니다. 조국해방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광복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해 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 바로 박달동무가 지도하는 갑산공작위원회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나와 박달의 담화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화제로 된 것은 우리의 통일전선정책과 조국광복회에 대한 문제였다.

박달은 반일민족통일전선의 필요성과 그것을 확대강화하기 위한 제반조치,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이 담고 있는 총적인 지향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그는 조국광복회가 내세우고 있는 목적의 높이와 보편성, 포괄하고 있는 역량의 방대성에 있어서 지난 시기의 신간회나 근우회와 같은 좌우합작의 소산이었던 민족단체들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거대형의 단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우리의 조치와 방침들을 어느 것이나 다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국광복회의 명칭이나 일부 조항들에 대해서는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기는 하지만 최종목적은 어디까지나 공산사회 건설에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국광복회 명칭이나 10대 강령을 보면 이러한 공산주의적 강령의 요구를 멀리 떠나서 민족주의 계선까지 후퇴한 감이 듭니다. 말하자면 최고강령을 포기하고 최저강령만을 내걸었다고 할까.… …』     

박달은 아마도 우리가 운동의 최고목적을 포기하고 모종의 기회주의적 입장에로, 적극적인 투쟁형식보다도 타협적인 개량주의 운동에로 돌아섰다는 비난이라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도 역시「대통영감」이 초기에 가지고 있던 교조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혁명이란 공산주의자들 몇사람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이 총동원되어야 우리 혁명은 승산있는 혁명으로 될 수 있다, 동무도 다 아는 바이지만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는 노동자, 농민이나 공산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온 민족이 압제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조선독립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역량을 다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워야 한다, 동무는 조국광복회 명칭문제에 의견을 가지지만 사실상 그것은 어떤 계층이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적합한 명칭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단체명을 하나 지어도 혁명이라는 말이나 적색이라는 말이 꼭 들어가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좌경의 한개 표현이다, 우리는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조직체의 명칭에 조국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그 단체가 어떤 한정된 계급이나 계층을 위한 조직인 것이 아니라 온 민족을 위한 조직으로 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려 하였다고 말해 주었다.

박달은 성진, 학성, 길주, 단천, 북청 지방사람들과 자주 만나서 서로 경험도 나누곤 한다고 하면서 그들이 지하활동을 우둔하고 거칠게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가령 성진 같은 곳에서는 농조원들이 단오명절날 씨름판에 가서도 표가 나게 붉은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쭉 둘러앉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방법으로 그들은 비조직군중과의 차이를 표시하였다. 씨름판에서 자기편이 눌리게 되면 승산이 있건 없건 연달아 선수들을 내보내는 인해전술로 상대를 압도하려고 극성을 부리는데 실력으로 당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씨름판에 고의로 분쟁을 일으켜 적색농조의 위력을 시위하였다. 시상부에 앉아있는 사복경찰들은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농조핵심들을 장악하였으며 그것을 단서로 하여 농조열성분자들을 검거하거나 지하조직들을 색출해 냈다.

그 당시 일부 지방들에서는 향교와의 관계에서도 좌경을 범하였다. 향교는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제사지내는 지방유지들의 봉건냄새가 나는 조직이었다. 여기서는 장의, 교감 등의 명예직을 주는 놀음을 하였는데 서로 만나 인사를 할 적에 아무개 장의님, 아무개 교감님 하면서 상대를 높여부르는 예법을 썼다. 이것은 물론 봉건유교도덕을 선양하는 것으로서 크게 장려할 것은 못되나 그렇다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반대하거나 하루아침에 깨어버리겠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좌경에 중독된 어떤 청년들은 봉건을 반대한다고 하면서 할아버지의 장의감투를 태워버리거나 찢어버리는 것과 같은 망동을 하여 늙은이들의 대통에 얻어맞는 창피까지 당하였다. 늙은이들은 공산당 패거리들이란 삼강오륜도 모르고 웃어른도 몰라보는 망종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야단법석을 하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덕을 보는 것은 일본제국의자들 뿐이었다. 그들은 향교에서 공자의 제사를 지낼 때 군수도 함께 참석시켜 절을 하게 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할아버지들을 반대하지만 일본 관청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시위하자는 속셈이었다. 적들은 이처럼 지방의 향교조직도 공산주의 세력을 반대하는데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거듭 말하지만 무슨 「적색」이니, 「혁명」이니 하는 요란스러운 명칭이나 단다고 해서 단체의 일이 잘돼나가는 것도 아니며 조직의 혁명성이 스스로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조국광복회 조직은 해당 지방의 형편과 대중의 각성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내올 수 있습니다. 가령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농민들은 농민 조합을 조직하며 청년들은 반제청년동맹이나 공산청년동맹 같은 것을 조직하는 식으로 실정에 맞게 조직을 내와야 합니다. 우리가 요해 한바에 의하면 국내 여러 지방들에는 진흥회라는 어용단체가 있는데 거기에 적지 않은 군중들이 망라되어 있다고 합니다. 각계각층 군중을 쟁취하려면 이런 단체들에도 뚫고 들어가야 합니다. 뚫고 들어가서 거기에 소속된 사람들을 혁명화하면 조국광복회의 창립선언정신에 부합되게 단체의 성격도 점차적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우리 혁명에 이로운 것이라면 그 어떤 명칭을 가진 조직이건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박달은 이 말을 듣자 자기를 뉘우치었다.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우리의 운동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박달을 통하여 국내투사들의 사고방식에서의 허점과 제한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고와 실천에서 그들이 범하고 있는 가장 큰 과오는 한마디로 말하여 민족주의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교조주의적인 이해였다. 그들이 민족주의 운동일반을 배척하고 경원시하는 것은 그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씹어서 소화하지 않고 통째로 받아들이던 행세식 공산주의자들과 독경식 마르크스주의신봉자들 일반이 범하고 있는 좌경적 편향이었다.

나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민족해방보다 더 큰 대의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민족을 떠난 공산주의 운동이란 있을 수 없으며 또 그런 공산주의 운동은 필요도 없다고 말해 주었다.

『우리가 말하는 민족의 개념속에는 노동자, 농민 뿐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창조적 노동을 사랑하고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사랑하는 각계각층 군중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총동원의 기준이며 조국광복회 입회기준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준에 기초하여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다 동원해야 합니다. 외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하며 또 이룩할 수 있다는 자주독립사상에 기초한 민족의 총동원만이 조선의 운명을 칠성판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박달은 사고와 실천에서 교조를 적지 않게 범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교조로 대담하게 인정하고 우리의 주장을 허심하게 받아들이었다.

나는 박달에게 갑산공작위원회를 조국광복회의 산하조직으로 하되 그 명칭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바꿀데 대하여 제의하였다. 박달은 그 제의에 흔연히 동의하였다.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조국광복회망을 국내에 확대하는 데서 나서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임무와 구체적인 방도들을 협의하였다. 밖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불을 쪼이면서도 담화하였다. 박달이 밀영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그와 함께 국내에 당조직을 확대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원호문제, 적통치기관 침투문제, 국내혁명가들의 신변보호문제, 앞으로의 연락방법과 연락장소, 암호, 연락원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을 논의하고 모든 문제에서 완전한 이해와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박달과의 접촉에서 내가 받은 가장 큰 인상은 그의 솔직성과 소탈한 품성, 혁명에 대한 진지한 태도였다. 그는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싫다고 생각하는 것도 입으로는 좋다고 표현하며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대방의 눈치와 시세를 봐가며 좋다고 말했다. 설사 상대방의 기분을 좀 거슬리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만을 말해야겠다는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검은 것은 검다고 말하고 흰 것은 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하겠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웃사람들의 눈치를 봐가며 흰 것을 검다고 하거나 검은 것을 희다고 하며 시세에 따라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는 방법으로 웃사람들에게 발라맞추는 것은 충신이 아니라 간신이다. 간신들의 혀끝에서는 진실이 서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박달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털어놓고 말하였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의 그런 성품에 완전히 반해 버리었다. 매력이란 결코 복잡하고 현란하고 다사스럽고 야단스러운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고 소박하고 솔직한 여기에 인간이 지니고 있는 매력의 핵이 있다.

공화국 정부의 초대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인 정준택도 소시민 출신의 인텔리이고 종파분자들에게서 정치적 박해를 많이 받은 간부였지만 내 앞에서는 항상 바른 말을 하였다. 그는 경제정책집행에서 가능한 것만 가능하다고 말하였고 불가능한 것은 절대로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가령 내가 왜곡된 보고를 듣고 어떤 생산지표에 대하여 정확치 못한 견해를 가질 우려가 있으면 나의 집무실에 와서 4시간, 5시간을 기다려서라도 기어이 나에게 정확한 실태를 보고하고는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도움으로 나라의 살림살이 전반을 항상 진상대로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고 경제사업에 대한 지도를 바로 해 나갈 수 있었다.

옛날에는 인재를 등용하는데서 첫째로는 문벌이 좋은 것을 취하고 둘째로는 모습이 청미한 자를 취하고 셋째로는 말씨가 순한 것을 취했다고 한다. 그러다나니 출신이 미천하고 체격이 왜소하고 말씨가 무뚝뚝한 사람들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장원급제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훈계하였다.

『사람은 문벌이나 재산이나 생김새나 말씨를 보고 취할 것이 아니라 능력과 됨됨이를 보고 취해야 하느니라.』

박달을 만나고 보니 어째서인지 외할아버지가 하던 이 말이 되살아났다. 외형상으로 수더분하게 보이는 이 박달이야말로 속대가 바로선 사람이었고 허식이나 겉치레를 모르는 솔직하고 소탈하고 성실한 인간이었다. 요새 사람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그는 정녕 심장에 남는 사람이었다.

『 내 몸이 열쪼각, 백쪼각이 되더라도 끝까지 장군님과 뜻을 같이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리라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국내당공작위원회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염려말아 주십시오.』

박달은 이런 말을 남기고 나와 헤어졌다. 물론 그는 약속대로 이제순이네 동네에서 만주산 메주콩을 한 달구지 사가지고 가서 순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7년 1월 갑산공작위원회의 지도핵심들은 박달의 사회하에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기 위한 모임을 열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들은 이 회의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집행대책도 겸하여 토의하였다.

조직대열을 갑산지방범위로부터 도범위, 전국적인 범위에로 확대해 나갈데 대한 문제, 동맹조직내의 일체 종파주의적 요소가 침습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경계할데 대한 문제, 비밀을 엄수할데 대한 문제, 동맹원교양문제, 기관지발행문제 등 당면한 여러 가지 실천적 문제들이 진지하게 토의되었다.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한 것은 조국광복회 운동사에서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변이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국광복회 조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시키는 하나의 발전기지로 되었다.

갑산공작위원회가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된 그때로부터 갑산지방 공산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일본새에서는 전환이 일어났다.

그들은 조선민족해방동맹기관지  「화전민」 에 우리의 노선을 소개하는 글들도 실어 하부조직들에 배포하였다. 갑산을 비롯한 함남북 일대에는 우리의 노선과 방침이 빠른 속도로 침투되고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 급속히 자라났다. 반일투쟁의 불길은 전례없는 열도를 가지고 타올랐다.

1937년 5월에 나는 다시 박달을 만났다. 최현부대의 무산방면 진출과 관련하여 갑산일대의 정세는 대단히 험악해 졌다. 국경일대에는 또다시 쥐새끼 한 마리 얼씬할 수 없는 삼엄한 경비진이 늘여졌다.

그러나 박달은 이번에도 경찰을 잘 구슬려 합법적으로 자기 마을을 떠나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국내형편과 사업정형을 놓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내운동정형에 대한 박달의 보고를 듣고 우리는 모두 만족해 하였다. 조국광복회 조직망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전위투사들의 줄기찬 노력에 의하여 빠른 속도로 진척되어가고 있었다. 조국광복회 조직은 갑산지방을 비롯한 현재의 양강도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성진, 길주, 단천, 홍원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의 주요지역들에 널리 뻗어가고 있었다. 투쟁방법도 훨씬 세련되어갔다.

우리는 박달에게 전투에서 노획한 경기관총 2정을 보여주었다. 박달이 그 무기들을 만져보며 기뻐하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내동무들을 만나보는 과정에 내가 느낀 문제점은 그들이 운동의 국내적 측면만을 놓고 문제를 설정하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국제적 판도에로 확대하면서 폭넓게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우리 혁명이 처하여있는 국제적 환경, 말하자면 국제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 그리고 일본공산당과 같은 조직들과의 관계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국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변들과의 연관속에서 조선혁명문제를 설정하도록 그들의 안목을 넓혀주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바치었다. 이것은 국내에서의 그들의 활동을 적극화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었다. 

그 무렵의 국제정세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구라파 대륙이 스페인 국제전쟁으로 한창 달아오르고 있을 때 아프리카 대륙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으로 하여 떠들썩하였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은 어떤 의미에서 스페인 내전보다 더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스페인 공민전쟁이 국제적인 성격을 크게 띤 것만은 틀림없으나 그것은 국내전쟁에 지나지 않는 사변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은 한 약소국가에 대한 강대국의 침략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이른바 강대국들이라고 하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그러한 무력침공을 조장하였으며 특히는 국제연맹이 아무러한 효과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에티오피아를 침략의 희생물로 고스란히 바쳤다는데 있었다.

일본의 만주침략과 독일에서의 나치스 정권의 출현은 이탈리아로 하여금 강도적이고 파렴치한 침략행위를 감행할 수 있게 한 국제적 배경이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마자 대독일제국건설에 달라붙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자본주의 열강들은 히틀러 정권의 출현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의 반공정책에 공감하고 관대하게 양보함으로써 독일무력을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방벽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거기에서 고무를 받은 파쇼독일은 1935년 1월에 자르를 병합하였으며 그해 3월에는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의 군사조항을 폐기하는데 이르렀다.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은 독일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부과하는 한편 그 나라가 10만이상의 군대를 못가지며 탱크와 비행기는 물론, 1,000톤급 이상의 함선조차 못가지게 규정하였다. 그러나 히틀러 독일은 이러한 조항들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36개 사단에 55만의 상비군을 설치할데 대한 「국방군편성법」을 발표하였다. 게링그는 독일공군의 공식편성을 선언하였다. 나치스 독일의 이 모든 움직임은 이탈리아를 노골적인 무력침공에로 사촉하고 고무하는 커다란 요인으로 되었다.

이탈리아는 침공구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에티오피아를 반대하는 여러가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의 대대적인 군사적 침공이 시간을 다투어 준비되고 있는 절박한 정세하에서 국제연맹 성원국이었던 에티오피아는 이 사실을 국제연맹에 제소하였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이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국제연맹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크게 건드리지 않는 식민지 문제를 놓고 이탈리아와 엇서려고 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는 거듭 중재를 요구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에티오피아 황제는 제네바에 자리잡고 있는 국제연맹의 총회에서 울면서 에티오피아를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고 한다. 에티오피아는 국제연맹 성원국이 아닌 미국에까지 각서를 보내여 영향력을 행사하여 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중립법」제정 등으로 고립주의 정책을 쓰던 미국도 아닌보살하였다.

1935년 10월 이탈리아는 선전포고 없이 에티오피아에 쳐들어갔다.

군민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는 패망하였다.

국제연맹은 이탈리아에 대한 아무러한 효과적인 제재도 가하지 않았으며 형식상 선포하였던 경제제재의 막 뒤에서 영국,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못본 체하였다. 가재는 게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맞았다.

국제연맹의 위신은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하기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도구로 시종일관 복무해온 그 연맹이 강자의 편을 든다고 하여 크게 놀랄 것은 없었다. 국제연맹은 초창기에 벌써  「위임통치령분배」형식에 의한 식민지재분할을 노골적으로 비호하였고 노골적인 반소정책을 실시하였다. 국제연맹이 일제의 만주침략을 얼마나 뻔뻔스럽게 두둔하였는가 하는 것을 세계의 양심들은 오늘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국제연맹은 파쇼독일의 자르강점과 스페인에 대한 독일, 이탈리아의 무력간섭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지어는 그 나라들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 한장 내돌리지 못하였다.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기구로서의 사명을 띠고 출현하였던 국제연맹은 그 후 오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독일의 침략행위도 묵인함으로써 사실상 그것을 도와주고 고무하였다.

파쇼세력과 군국주의 세력의 전횡이 날로 우심해 지고 있던 국제정세의 급격한 발전과 국제연맹의 무맥한 존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주체적인 역량에 기초하여 자주적으로 벌여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똑똑히 가르쳐주었다.

내가 박달을 다시 만났던 그 시기는 중국본토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시간문제로 남아있던 때였다.

「화북사변」은 실제로 화북을 일본제국주의의 천하로 되게 하였다.

 「화북사변」후 일본제국주의는 군비확장과 전쟁준비를 더욱 다그쳤다. 1936년 8월 히로다 내각은 일본은 동아대륙에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남양으로 발전하여야 한다고 하는 기본국책을 확정하였다. 이것은 중국을 전면적으로 침략하며 동시에 북진하여 소련을 반대하고 시기를 기다려 남으로 진공하려는 전력방안의 하나였다.

박달을 비롯한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은 국제정세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매우 심중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멀지않아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전제 밑에서 국내의 혁명가들이 그에 맞게 역량결속을 잘하고 조성된 정세를 잘 이용하면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 벌여나갈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일본은 조만간 중국에서 더 큰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투쟁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네들이 전쟁수행을 위해서 수탈도 강화하고 목조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의 후방에는 빈구석이 많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일본이 전선을 넓혀갈수록 우리도 넓은 판도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박달동무는 새로운 정세에 주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잘 움직여서 반일역량을 더 많이 집결시키며 폭동적 진출에로 나갈 수 있는 차비도 잘 갖추어놓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또한 박달에게 보천보 시가의 약도를 그려오며 일제의 국경경비정형을 상세히 조사보고할데 대한 특별과업을 주어 밀영을 떠나보냈다. 박달은 우리가 준 과업을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그가 그린 약도와 조사보고자료는 보천보 전투의 성과를 보장하는데서 큰 기여를 하였다.

보천보 전투가 있은 때로부터 엿새째 되는 날 우리는 통신원을 보내어 박달을 다시 불렀는데 부대를 데리고 간삼봉 쪽으로 총총히 가다보니 만나지 못하였다. 보천보가 된타격을 받은 후 조선총독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함흥 74연대 병력과 장백현 주둔군, 국내경찰들을 집결하여 우리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해 7월에 다시 박달을 불렀다. 그러나 그가 적들에게 붙잡힌 것으로 하여 이번에도 우리의 상봉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병선만이 박달의 체포와 관련한 소식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실태보고를 하였다.

나는 이병선에게 우리가 명천, 성진 지방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연계를 지어줄데 대하여 부탁하였다. 동시에 국내에서 생산유격대를 내올데 대한 과업도 겸하여 주었다.

이병선을 통하여 준 임무는 훗날 유치장에서 나온 박달에게 전달되었다.

1938년 6월 박달은 국내조직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는 어려운 정세 속에서 그 수습책과 관련된 우리의 조언을 받으려고 장백일대의 수림에서 한달 이상이나 우리를 찾아헤매었다고 한다.

그 당시 임강, 몽강 방향에 나가서 활동하고 있던 나는 퍽 후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일제경찰은 박달을 비롯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핵심역량을 체포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혜산경찰서의 조선인 경부 최령이 사복경관, 자위단, 소방대까지 다 끌어내어 박달의 뒤를 추적하였다.

박달과 김철억은 김철억의 4촌형인 김창영의 변절로 하여 1938년 9월과 10월에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이용술(이경봉)도 붙잡혔다.

교형리들은 박달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을 들이대었다. 그들이 알고 싶어한 것은 우리의 위치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조직성원명단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모진 고문도 철석같은 의지를 지닌 박달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적들은 처음에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가 증거부족으로 무기징역형을 내렸다.

살인귀들의 고문장은 박달의 육체를 여지없이 파괴해 버리었다. 척추가 부러지고 다리뼈가 부서졌다. 그렇지만 그의 넋은 변하지 않았고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불구의 몸으로 우리의 후대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옥고를 치르며 7∼8년 동안이나 기적적으로 역경을 이겨냈다.

해방후 어느날인가 나는 박달이 살아서 서대문 형무소를 나왔다는 통지를 받았다. 들것에 실리어 감옥문을 나선 박달은 한동안 서울에 주저앉아 부인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척수염이라는 진단을 내리었다. 후에 의학박사인 최응석이 다시 진찰을 하고 박달의 병명을 척수결핵이라고 정정하였다. 박달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무국장을 서울로 보내어 박달을 평양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이전 날의 박달은 하룻밤에도 수백리길을 날아다니던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고 강기가 있는 혈기왕성한 사나이었다. 그러나 그날 남의 등에 업혀 내 앞에 나타난 박달은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옛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처참한 몰골의 불구였다. 피골이 상접한 그의 갑삭한 몸은 한줌안에라도 들것처럼 작아 보이었다.

그래도 박달은 두 팔로 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좔좔 흘리었다. 살아서 나를 다시 만났으니 죽어도 원이 없다고 하였다. 박달을 진찰한 의사들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진단을 내리었다. 구원할 가망이 있다고 말하는 의사는 한명도 없었다. 박달은 감옥문을 나설 때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 집옆에 박달의 집을 잡아주고 그를 소생시키기 위한 면밀한 치료대책을 세웠다. 명약이란 명약은 다 구해다주고 명의란 명의는 다 데려다가 그의 치료를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집무실에 오갈 때면 문병을 하곤 하였다. 어느해인가는 남포 우산장에 젖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젖소를 가져다가 우유를 짜서 그에게 공급하도록 하였다. 3년간의 큰 전쟁이 있은 후에는 주을휴양소에  「박달각」을 따로 내오고 그를 치료해 주었다. 박달이 주을에서 요양생활을 할 때마다 우리는 비행기를 동원하여 그가 좋아하는 남새를 평양에서 실어다 공급해 주었다.

『빨리 병을 고치고 장군님을 도와드려야겠는데…』

이것은 박달이 침상에서 노상 걱정하던 말이다. 그는 병마를 털고 일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의료진의 성의있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세는 날을 따라 악화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박달이 그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위중한 상태에서도 당과 혁명에 이바지하기 위해 늘 마음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49년에 있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우산장휴양소에서 요양생활을 하고 있던 박달은 주변농촌의 과수원들에서 사과에 봉투를 씌우지 않아 병충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휴양소에 와있던 남반부 출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과 휴양소 직원들을 발동하여 사과봉투를 만드는 일을 조직하였다. 박달자신도 침상에 누워 가슴에 널판자를 놓고 봉투를 만들었다.

전후 주을에서 치료받을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박달은 우리가 보내준 삼륜차를 타고 주변농촌에 나갔다가 당에서 심으라는 벼종자를 심지 않아 벼이삭에 쭉정이가 많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쭉정이가 많은 벼이삭을 봉투에 넣어보내면서 당의 농업정책이 정확히 집행되지 않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우리는 그의 보고를 받고 어느 회의에선가 박달과 같이 불구의 몸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사람도 당정책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있는 현상을 발견하고 그것이 너무나 가슴아파서 당중앙에 보고하는데 지방일꾼들은 왜 그런 현상을 모르고 있는가고 비판하였다. 그후 함북도당위원장은 박달을 찾아가서 자기비판을 하였다고 한다.

박달은 자기가 영영 일어날 수 없다는 것과 또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때부터 침상에 누워서 청소년 교양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기 바쁘게 박달을 찾아가 그런 무리한 일은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자 박달은 내 손을 꼭 붙잡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장군님 덕인데 조금이라도 혁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서 오래오래 살 것 같습니다, 나는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책임자의 임무를 다 수행하지 못하고 일제경찰에게 붙잡혀서 결국 지금은 국가의 밥만 축내는 폐인이 되었지만 그날에 받은 혁명임무를 마저 수행하려는 심정에서 다소나마 힘을 바치고저하니 부디 막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오스트로프스키는 눈먼 장님이 되어가지고도 혁명을 위해 장편소설을 쓰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래도 밝은 눈을 가지고 있는데 글이야 왜 못쓰겠습니까. 물론 글재간이 없어 걸작이야 못내놓겠지요.』

박달은 한평생 자기의 손발이 되어주고 간호사가 되어준 충실한 아내 현금선과 의료일꾼들의 방조를 받으며 수기「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와 항일혁명투쟁시기 갑산지방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반영한 자서전적 장편소설 「서광」을 쓰기 시작하였다. 심장의 피를 찌워 한자한자 쪼아박듯이 쓴 그의 글줄들은 그 속에 담긴 혁명에 대한 열화같은 충정으로 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어주었다.

수많은 독자들이 그의 앞으로 독후감과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박달은 자기의 글이 삶의 귀중한 길동무로 되고 있다는 독자들의 편지에서 고무를 받으며 여러편의 글을 연방 써냈다.

어느날 그는 자를 가지고 침대를 재어가며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숫자를 적은 종이장을 아내에게 내보이었다. 거기에 적은 치수대로 책상을 하나 짜주면 그것을 침대위에 가로건너놓고 글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며칠후 그가 부탁한 책상을 목수가 정성껏 짜서 보내왔다.

박달은 책상다리를 두손으로 어루만지며 부인에게 말하였다.

『책상을 아주 잘 짰소. 여보, 이 책상을 잘 건사해 주오. 내 이제 좀 쉬고 이 책상을 놓고 글을 쓰겠소.』

그러나 박달은 그 책상에서 한번도 글을 써보지 못하였다.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충정으로 높뛰던 그의 심장이 고동을 멈춘 것이다. 그의 서거에 대한 부고를 듣고 온 나라가 깊은 애도의 정에 휩싸이었다.

우리는 박달의 집에서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를 열고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고인을 발인할 때 나는 영구와 함께 나갔다. 백두산에서 박달과 헤어질 때 멀리까지 바래주지 못했던 그 아쉬움이 항상 심중에 매달려 있었는데 영결하는 순간에나마 그를 바래주고 싶었다. 어떻게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손수건이 푹 젖어있었다. 나는 김책을 잃었을 때처럼 또 식사를 하지 못하였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가 해방된 조국땅을 제발로 걷는 것을 보았더라면 그다지도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후 박달이 해방 전에 쓰던 보천군 운흥리의 집을 원상대로 복구하고 집 앞에 그의 동상을 세워주었다. 아마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혁명가들을 위해 건립한 최초의 동상일 것이다.

박달은 원수와의 싸움에서 날개를 잃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혁명을 위해 굴함없이 싸운 투사였다.

참으로 박달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나온 이후시기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의 일원화를 맨처음으로 실현한 국내혁명가의 당당한 대표자였으며 우리를 위하여 일도 제일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겪은 우리의 국내전권대표였다. 박달과 같은 이런 투사들의 덕으로 우리는 해방직후 그처럼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단시일안에 당을 창건하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일떠세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