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미국의 조선 분할점령과 진보적 민주정부 수립의 좌절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내밀었던 제국주의지배정책
3. 전후 조선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소련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
4. 불완전한 승리를 담은 모스크바 국제협정
5. 전후 조선에서 진보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경로
6. 제국주의지배세력 안에서 생겨난 경쟁적 갈등
7. 통일전선을 가로막은 세력들
8. 세 갈래 사회정치세력의 야합
9. 국무성의 3단계 방안과 군정청의 좌우합작공작
10. 제국주의지배정책이 조절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1947년의 정세변화
11. 통일전선운동의 위기와 기회가 엇갈린 1947년
12.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버린 미국
13.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정책과 반공산주의정책을 추종한 리승만
14. 미국 국가정보기관의 비밀정치공작
15. 단독정부 수립을 향하여 돌진한 리승만
16. 글을 마치며

 

1. 글을 시작하며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 계승발전되는 것이다. 계승발전되지 않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현재와 단절된 과거사(過去事)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사는 그것을 현재로 계승발전시키는 주체의 요구에 의해서 역사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 뜻에서, 역사는 과거사를 계승발전시킨 현재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사를 현재로 계승발전시키는 주체가 자기의 요구를 실현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거사에서 무엇을 이어받고 무엇을 끊어버리며,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과거사가 아니라 역사를 되새기며 배워야 하는 이치가 거기에 있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의 현대사는 한(조선)민족의 운명을 결정하였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역사를 현재로 어떻게 계승발전시키는가에 따라서 21세기 한(조선)민족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이 글은 8.15 조국광복 직후 3년의 현대사 가운데서 오늘 한(조선)민족이 끊어버리고 없애버려야 할 과거사를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인식한다.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현대사를 인식하는 것은 오늘 자기의 정치적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싸움에 나선 한(조선)민족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 글이 8.15 조국광복 직후 3년 동안에 끊어버리고 없애버려야 할 역사를 다루는 것과 대조적으로, 내가 2005년 5월 3일에 작성한 「8.15 이후 3년 동안 전개된 통일전선운동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글은 한(조선)민족이 현재로 계승발전시켜야 할 역사를 다루었다.

조국광복 60년을 맞은 오늘까지 한(조선)민족이 자기 조국의 통일을 실현하지 못한 여러 원인들 가운데서 역사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조국광복 직후 3년 동안에 끊어버리고 없애버려야 했던 역사를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계승발전해야 했던 역사를 그렇게 하지 못하였던 데 있다. 역사에서 단절과 제거가 없는 계승과 발전은 있을 수 없으며, 그 반대도 진실이다.

이 글을 쓰면서 다루었던 자료들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지기 이전 시기에 쓰여진 것들이므로, 이 글에서는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그대로 쓴다. 이 글에 나오는 나라이름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줄인 이름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지기 이전에 한(조선)민족이 5백 년 동안 자기 나라를 부르던 옛 이름이다.

2.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내밀었던 제국주의지배정책

인류에게 참혹한 상처를 안겨준 제2차 세계대전은 '악의 축(Axis of Evil)'이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 삼국파쇼동맹이 무너지면서 1945년 초여름에 막을 내리고 있었다. 세계대전의 포성이 멎은 것은 식민지강점과 제국주의전쟁으로 찢겨나간 세계사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뜻하였다.

그러한 세계사적 변화는 한(조선)반도와 동아시아의 정세에 예측하기 힘든 격변의 소용돌이를 몰아오고 있었다. 전범국 일본에게 핵공격을 퍼부어 일본열도를 단독으로 점령하고 도쿄에 재빨리 지배거점을 차린 제국주의 미국은, 만주와 사할린에서 일제침략군을 들이치면서 한(조선)반도에 상륙한 사회주의 소련의 남진을 서둘러 막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국이 한(조선)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분할점령하려고 서둘렀던 데는 그러한 까닭이 있었다. 같은 시기, 중국은 일제침략과 항일전쟁의 피 어린 고비를 넘자마자 다시 내전의 불길 속에 휩싸였다. 동아시아 정세는 제국주의 미국의 일본 점령과 한(조선)반도 분할점령, 그리고 중국 내전이 뒤엉킨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면서 한 걸음 앞도 보이지 않는 혼미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여기서 눈여겨보는 문제는, 그러한 혼미한 정세에서 전후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가진 미국의 지배세력이 무엇을 생각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자료들을 종합분석하면, 그 무렵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은 다음 두 가지 정책을 저울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 적국(enemy state)에 대한 정책이다. 이 정책은 연합군과 맞서 싸우다가 거꾸러진 적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며,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고 있는 점령지에서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내세우고 그 세력이 집권하게 만드는 정책이었다. 제국주의 미국이 '악의 축'으로 규정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그러한 정책을 들이미는 대상으로 되었다.

미국이 분할점령한 서부독일에서는 기독교민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를 수반으로 하여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이 야합한 반동연립정권(reactionary coalition-regime)이 세워졌다.

전후 이탈리아에서는 반나치투쟁의 경력이 있는 기독교민주당 대표 알리씨드 드 가스페리(Alicide De Gasperi, 1881-1954)를 수반으로 하여 불안정한 민주연립정권(democratic coalition-regime)이 세워졌으나, 1947년에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단독으로 틀어쥠으로써 불안정한 민주연립정권은 결국 반동적 연립정권으로 변질되었다. 전후 이탈리아에 세워졌던 민주연립정권은,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의 지시로 1947년에 개편창설된 중앙정보국(CIA)이 전후 해외에서 벌인 파괴공작의 첫째 대상이었다.

전후 일본에서는 서부독일과 비슷한 경로를 밟아 1947년에 자유당 대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를 수반으로 하여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이 야합한 반동연립정권이 세워졌다.

2) 비적국(non-enemy state)에 대한 정책이다. 이 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국주의세력에 의해서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강점되었다가 해방된 비적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이전의 식민지예속세력을 새로운 친미예속세력으로 바꾸어놓고 그 세력이 집권하게 만드는 정책이다. 조선, 필리핀, 그리스가 그러한 정책을 들이미는 대상으로 되었다.

먼저, 전후 필리핀의 정치정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전에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1월 2일 일제침략군이 마닐라를 점령하면서 제국주의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가 필리핀 전역이 일제 강점에서 '해방'되었음을 선포했던 때는 1945년 7월 5일이었다. 전후 필리핀에서 추진된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정책은, 1946년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에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우두머리인 매뉴얼 락서스(Manuel Roxas, 1894-1948)를 내세운 친미예속적 반동정권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미국의 필리핀 지배정책은 이전에 일제침략군에 맞서 싸웠던 '반일인민군(Hukbalahap)'이 친미예속적 반동정권을 앞세운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정책에 반대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이자 난관에 빠졌다. 이른바 '후크단의 반란'으로 알려진 필리핀 민중의 반미무장투쟁은 19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1941년 4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나치독일에게 점령되었던 그리스의 전후 정치정세도 필리핀과 비슷하였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1-1947)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 영국은 나치독일이 거꾸러지자 그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민족통일전선의 완강한 반영항쟁에 밀려났고, 1947년 5월부터는 영국의 뒤를 이어 미국이 그리스 지배정책을 들이밀었다. 그리스의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뒤에서 조종하였던 제국주의 미국은 그리스 민족통일전선을 짓누르고 1952년에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우두머리인 알렉산더 파파고스(Alexander Papagos, 1883-1955)를 내세워 친미적 반동정권을 세웠다.

미국이 필리핀을 다시 점령하고 친미예속적 반동정권을 세우기까지 1년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에 견주어, 전후 조선과 그리스에서는 사정이 매우 달랐다. 조선은 일제 식민지로 40년을 지내왔으므로, 친미예속적 반동정권의 기반이 될만한 사회정치세력이 아직 힘을 갖지 못하였다. 그리스에서도 친미예속적 사회정치세력은 아직 힘을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제국주의 미국이 전후 조선에서 일제의 패망으로 기가 꺾인 친일예속적 사회정치세력을 감싸고 내세우면서 친미적 반동정권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전후 그리스에서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여기서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친미(pro-American)란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대외적 개념이며, 반동(reaction)이란 한(조선)민족 안의 계급관계에서 생겨나는 대내적 개념이다. 이를테면, 리승만(1875-1965)은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대표였고, 1948년의 남북연석회의에 전향적으로 참가하기 이전의 김구(1876-1949)는 국수주의적 사회정치세력의 대표였으며, 김성수(1891-1955)는 친일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대표였다. 8.15 조국광복 직후에는 아직 힘을 갖지 못했던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은, 제국주의 미국의 조선 분할강점과 지배정책이 본격화되는 것에 따라 친미예속적 사회정치세력으로 변모되었다.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아직 힘을 갖지 못한 전후 조선에서 제국주의 미국은 황급히 친일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감싸고 내세우는 일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세력은 전후 조선에서 새로운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길러내려면 20-30년의 기간이 요구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미국이 전후 조선에서 20-30년 동안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정책을 내밀려고 했던 까닭은, 그 기간에 새로운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길러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구분해야 하는 것은, 유엔헌장 제11조에 규정된 신탁통치와 모스크바 국제협정이 규정한 신탁통치의 차이점이다. 유엔헌장에 따른 신탁통치는 유엔신탁통치위원회(U.N. Trusteeship Council)가 실시하는 것이며, 모스크바 국제협정에 따른 신탁통치는 그 협정에 서명한 소, 미, 영, 중 네 나라 정부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실시되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는 그가 갑자기 병사하기 두 달 전인 1945년 2월 8일에 열린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에서 조셉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을 만났을 때,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한 경험에 비춰봐서 조선에서는 20-30년 동안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눈여겨보는 것은, 전후 조선에 대한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훨씬 전부터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은 미국 국무성이었고, 그에 비해 육군성은 분할점령정책을 내밀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책적 차이를 원인으로 하여 전후 조선을 점령, 분할, 지배하는 과정에서 국무성과 육군성이 벌인 갈등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국무성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정책에 따라 전후 조선에 대한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을 처음으로 검토하고, 당시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 1871-1955)에게 보고하였던 때는 1942년 말이었다. 그 뒤로 조선에 대한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은 국무성의 대외정책에 관한 국무성 자문위원회 안보소위원회(Security Subcommittee of State Department's Advisory Committee on Foreign Policy)에 의해서 조절되었다.

미국 국무성이 준비하였던 전후 조선에 대한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은, 미국군이 조선을 분할점령한 1945년부터 1965년이나 1975년까지 20-30년 동안 전승국 네 나라가 각각 5-6년 씩 기간을 나누어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면서, 그 기간에 미국은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길러내려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성이 세우고 있었던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은 1945년 9월 9일 미국군이 조선을 분할점령하고 조선총독부를 장악하면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미국군이 조선을 분할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자 분할점령정책을 내밀려는 육군성이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을 내밀려는 국무성에 비해서 유리한 위치를 먼저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에 대한 정책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국무성은 조선에서 국제신탁통치를 이른 시일 안에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주도권을 틀어쥐려고 하였다. 『미국 국무성 비밀외교문서』에 따르면, 1945년 10월 중순 국무성이 도쿄의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부에 보낸 훈령은, 소련과 미국의 민간행정부가 전후 조선을 지배하고 소련, 미국, 영국, 중국의 국제신탁통치가 실시되는 두 단계를 거쳐 조선을 독립시키는 과정을 상정한 조선정책을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부가 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45년 10월 20일 국무성은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 조정위원회 극동소위원회가 입안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전후 조선에 대한 소련과 미국의 군사점령이 하루빨리 국제신탁통치로 대체되어야 하며,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기 위한 국제정치회담이 곧 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5년 10월 20일 미국육군사령부가 펴내는 『성조기(The Stars and Stripes)』는 미국 국무성 극동국장 존 빈센트(John Carter Vincent, 1900-1972)가 뉴욕에 있는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에서 전후 조선은 자치능력이 없으므로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음을 보도하였다.

3. 전후 조선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소련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

전후 조선에서 20-30년 동안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면서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길러내려던 미국의 제국주의정책은 사회주의 소련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정책에 맞서서 소련은 자신이 해방한 비적국들에서 진보적 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한 후견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소련이 자신에 의해서 해방된 나라들에서 세워지기를 바랐던 새로운 정권의 성격은, 제국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들이 연합하여 민주개혁을 실시하는 진보적 민주정부였다. 그런데 냉전시기에 생겨난 반공산주의의 낡은 관점을 가진 역사가들은, 소련에 의해서 해방된 비적국들에서 소련이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정권과 소련의 지령을 따르는 위성국을 세우려는 정책을 내밀었다고 주장하였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소련은 전후 조선과 동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진보적 민주정부 수립을 후견하는 정책을 내밀었다.

진보적 민주정부에 의해 세워진 민주주의국가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가 아니면 소련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주노선을 추구하는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국가에 대한 소련의 외교정책에 의해서 결정되는 타율적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국가의 주체역량에 의해서 결정되는 자율적 문제였다. 실제로, 전후에 생겨난 민주주의국가들 가운데는 소련의 위성국이라는 비판을 들을 만큼 자주성을 지니지 못한 동유럽 나라들이 있었던 반면, 민족주체역량을 발휘하여 소련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주노선을 추구한 동아시아 나라들도 있었다.

명백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한(조선)반도가 사회주의 소련과 제국주의 미국이 정면으로 맞부딪친 최대의 충돌지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미국 전략정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국장이었던 육군소장 윌리엄 도노반(William Joseph Donovan, 1883-1959)은, 조선은 미국에게 중요한 전략지역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소련과 직접 단독으로 상대하는 것은 조선에서이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1947년 5월 6일자) 전 미국대통령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1874-1964)는 연방하원 세출위원회 증언에서 "소련은 구주(유럽-옮긴이)의 장애물이며 동시에 조선 통일에 관한 장애물이다. (줄임) 조선이 재통일된다 해도 누군가 금후 25년 동안 그들의 정부를 감독하여야 할 것이다. (줄임) 우리는 남조선을 자유자족케 할 수 있을 것이나 소련이 북방에 잔류하는 동안 강력한 점령을 계속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20일자)

제국주의 미국이 일제침략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조선)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분할경계선은, 소련의 진보적 민주정부 후견정책과 미국의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이 맞붙은 국제정치대결의 전선으로 어느덧 바뀌고 말았다. 미국의 『연합통신(United Press)』 부사장 얼 존슨(Earl J. Johnson)은 조선 시찰을 마치고 떠나면서 "현재 세계를 분할시키고 있는 2대 이데올로기 대립은 이 나라(조선-옮긴이)에 있어 분할경계선 때문에 기타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현저한 초점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30일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국제정치질서가 빠르게 재편되는 가운데 사회주의 소련 대 제국주의 미국의 정치대결이 여러 나라들에서 벌어진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나, 진보적 민주정부 후견정책과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이 정면으로 맞부딪친 나라는 조선이 아니고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제 식민지강점에서 해방된 조선이 그러한 국제정치대결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 것은 불행이며 재앙이었다.  

전후 조선에 밀어닥친 불행과 재앙은 1945년 12월 6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소련, 미국, 영국의 외상회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스크바 삼국회의로 알려진 그 회의에서는 소련 외상 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ikhailovich Molotov, 1890-1986),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James Francis Byrnes, 1879-1972), 영국 외상 앤터니 이든(Anthony Eden, 1897-1977)이 마주앉았는데, 그 회의의 내막을 살펴보면 미국의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과 소련의 진보적 민주정부 후견정책이 맞부딪친 국제정치회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스크바 삼국회의에서 소련과 미국이 각기 자기의 정책을 내놓고 논쟁을 벌이면서 타협안을 찾기까지는 무려 열흘이나 걸렸다. 모스크바 삼국회의는 전후 조선에 관한 정치문제만 다루지는 않았으나, 12월 6일에 막이 오른 회의가 12월 26일에 가서야 끝난 까닭은 조선을 비롯한 점령지들에 대한 전후 처리문제를 타협해야 하는 복잡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 불완전한 승리를 담은 모스크바 국제협정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정치대결, 곧 진보적 민주정부 후견정책 대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의 대결에서 일단 승리한 쪽은 소련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소련의 정치적 승리는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불완전한 승리에 그쳤다. 그러한 불완전한 승리를 담은 국제협정이 저 유명한 모스크바 국제협정이다. 모스크바 국제협정 가운데 전후 조선 문제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고 조선이 민주주의원칙 위에서 발전하게 하며 장시간에 걸친 일본통치의 악독한 결과를 쾌속히 청산할 제 조건을 창조할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가 창건되는데, 임시정부는 조선의 산업, 운수, 농촌경제 및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필요한 방책을 강구할 것이다.

2) 조선임시정부 조직에 협력하며 이에 적용할 제 방책을 예비작성하기 위한 남조선 미국군사령부 대표들과 북조선 소련군사령부 대표들로써 공동위원회를 조직한다. 위원회는 자기의 제안을 작성할 때에 조선의 민주주의적 제 정당 및 사회단체와 반드시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문은 공동위원회에 대표로 되어 있는 양국 정부의 최종적 결정이 있기 전에 미, 영, 소 제국 정부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3) 공동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참가시키고 조선의 민주주의적 제 단체를 인입하여 조선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조선독립의 확립을 원조협력(후견)하는 제 방책도 작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의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후견의 협정을 작성하기 위해 미, 영, 중, 소 제국 정부의 공동심의를 받아야 한다.

4) 남북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를 심의하기 위해 그리고 남조선 미국군사령부와 북조선 소련군사령부의 행정 및 경제부문에 있어서의 일상적 조정을 확립하는 제 방책을 작성하기 위해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 소 양국군 사령부 대표로써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한국근현대사사전』, 282쪽)

위 협정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두드러져 보인다.

1) 국제협정은 해방된 조선에서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운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이것은 모스크바 삼국회의에서 미국이 내놓은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이 통하지 않았고, 소련이 내놓은 진보적 민주정부 후견정책이 통하였음을 뜻한다. 소미 공동위원회의 소련 수석대표 테렌티 스티코프(Terentyi Shtikov)는 모스크바 국제협정은 "어느 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배에 대해서 결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그 협정은 "조선인민에게 가장 짧은 기한으로, 즉 5년 이내에 조선인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민주주의적 정권을 수립하는 조직적 방향에서 독립국가를 창설할 수 있게 할 제 원조에 대하여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신문』 1947년 8월 10일자)

2) 국제협정은 두 주일 안에 소미 두 나라의 조선주둔군사령관으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내오고, 조선의 임시정부 및 민주주의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그 공동위원회가 전후 조선의 민주개혁과 자주독립을 원조후견하는 여러 정책을 세운다고 밝혔다.

3) 공동위원회가 조선의 임시정부 및 민주주의 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세우는 정책들 가운데는 조선의 임시정부와 협의하고, 소련, 미국, 영국, 중국이 공동으로 심의하는 과정을 거쳐 이 네 나라가 전후 조선에서 5년 이내로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는 협약이 포함된다.   

위 내용을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사항은 소련의 요구가 채택된 것으로 보이며, 세 번째 사항은 미국의 요구가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 삼국회의에서 미국의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이 소련의 반대에 부딪혀 사실상 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전후 조선에서 20-30년 동안이나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려던 미국의 계략은 그 기간을 5년 안으로 크게 줄이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소련과 미국의 두 나라 합의에 의하여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려던 미국의 계략도 소, 미, 영, 중 네 나라 정부와 협의하는 한편, 조선의 임시정부 및 민주주의단체들과도 협의하여 실시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전후 조선에서 국제신탁통치가 실시되는 경우에, 조선의 민주주의단체들과 소미 공동위원회의 합의→조선임시정부와의 협의→소, 미, 영, 중 네 나라 정부의 공동심의로 이어지는 여러 단계와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전후 조선의 정치문제에 대해서 소련과 미국이 마음대로 합의할 수 없고, 반드시 조선임시정부 및 민주주의단체들과 협의함으로써 한(조선)민족의 정치적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는 경우, 조선임시정부와 민주주의단체들은 미국이 들고 나온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을 강하게 반대할 것이 분명하고, 소련도 그 반대를 지지하게 될 것이고, 전후 조선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영국과 중국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 명백하였다. 따라서 한(조선)민족이 우선 조선임시정부(Korean provisional government)를 세우고 그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주체역량을 강화하여 싸운다면, 미국의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은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임시정부란 제국주의와 파시즘,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진보적 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결집한 새로운 형태의 정권을 뜻한다. 당시 이름난 맑스주의 역사가이며 정치활동가였던 백남운(1897-1979)은 1946년 4월 15일에 발표한 『조선민족의 진로』라는 글에서 조선의 진보적 민주정부를 '민주정치와 민주경제가 부합되는 연합성 신민주주의의 정치형태'로서 '연합민주정권'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김남식 엮음, 『남로당연구 자료집』 제1집, 163쪽) 또한 조국광복 이후 남조선에서 통일전선운동에 앞장섰던 뛰어난 정치활동가 여운형(1885-1947)은 해방된 조선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인민적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60년 전에 전개되었던 진보적 민주정부 수립운동은 오늘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운동과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운동으로 계승발전되었다.

5. 전후 조선에서 진보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경로

내 분석으로는, 모스크바 국제협정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대한 정치적 의미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1) 소련, 미국, 영국, 중국이 국제협정을 체결하여 임시정부의 수립을 보장해주는 유리한 조건에서 우선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성격은 제국주의와 파시즘, 봉건주의를 반대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결집된 민족통일전선의 기반 위에 세워지는 통일정부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정부형태에 관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또는 과도정부(interim government)를 먼저 세우고 그것을 강화해 나가는 단계적 발전과정은 통일정부를 세우는 과정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자치정부(self-government)를 세우는 것은 단독정부(separate government)를 세우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2)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움으로써 제국주의 미국이 북위 38도선에 그어놓은 분할경계선을 없애는 것이다. 북위 38도선의 분할경계선을 없애는 것은 통일정부를 세우는 데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3)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는 한(조선)반도 전역에서 자주권을 행사하고 민주개혁을 수행하는 통일정부로 강화발전되는 것이다. 자주권을 행사하고 민주개혁을 수행하는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곧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으로 통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국제협정에서 소련이 미국과 정치대결을 벌여 얻어낸 불완전한 승리는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에 의해서 완전한 승리로 될 수 있었으며, 미국이 전후 조선에서 내밀려던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은 한(조선)민족의 사회정치역량이 결집한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깨부술 수 있었다.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는 첫 단계는 조선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이었으므로, 한(조선)민족은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주체적으로 이행하면서 우선 임시정부를 세우고, 임시정부의 힘으로 제국주의 미국의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을 막아내야 하였던 것이다.

내 분석으로는, 일제의 식민지 강점에서 해방된 한(조선)민족이 진보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경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경로는 곧바로 진보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경로다. 이것은 민족주체역량이 단독적으로 나아가는 급진적 경로다.

제2경로는 우선 임시정부를 세우고 그 정부를 진보적 민주정부로 강화발전시켜 나가는 경로다. 이것은 민족주체역량이 단독적으로 나아가는 점진적 경로다.

제3경로는 임시정부 수립과 국제신탁통치 실시→진보적 민주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경로다. 이것은 민족주체역량이 모스크바 국제협정의 지지를 받으며 나아가는 점진적 경로다.

제1경로는 한(조선)민족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었으나, 8.15 정국의 국내정세와 국제정세가 매우 복잡하고 불안정하게 조성되었으므로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었다. 당시 국내정세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흩어져 있었으므로 진보적 민주정부를 곧바로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진보적 민주정부를 세우려면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에 동의하는 사회정치역량이 결집한 통일전선을 먼저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른 한편, 당시 국제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것과 더불어 전승국인 소련과 미국이 패전국과 식민지를 점령하였는데, 특히 조선은 그 두 나라가 분할점령하고 사회주의 소련 대 제국주의 미국의 국제정치대결이 벌어진 아주 복잡한 정세 속에 휘말려있었으므로 진보적 민주정부를 곧바로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처럼 복잡한 정세에서 실제로 가능한 것은 제2경로와 제3경로였다.

중요한 것은, 전후 조선이 제2경로나 제3경로를 이루려면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이다. 모스크바 국제협정이 제2경로로 이행되는가 아니면 제3경로로 이행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한(조선)민족이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또 능히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다.

미국에 의해서 분할점령된 조선의 정치정세를 되새겨볼수록, 임시정부→진보적 민주정부→자주적 통일국가를 세우는 경로는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주체적으로 이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한 마디로 말하여, 모스크바 국제협정의 주체적 이행은 전후 조선에서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루어 가는 하나뿐인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이어진 역사는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는 가장 좋은 길이 아니라 예속과 억압이 뒤엉키고 분단과 전쟁이 몰아치는 가장 나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불행이 더 큰 불행을 낳는다고 했던가, 사회주의 소련 대 제국주의 미국의 국제정치대결이 전후 조선을 무대로 하여 벌어진 것도 불행이었는데, 그 불행은 세기가 바뀐 오늘까지 60년 동안이나 예속과 억압, 분단과 전쟁이 교차하는 민족적 재앙으로 변질악화되고 말았다.

아래에서 다시 논하겠지만, 그러한 민족적 재앙을 일으킨 책임은,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버리고 한(조선)민족에게 예속과 억압, 분단과 전쟁을 들이민 제국주의 미국과 남(한국)의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에게 있다. 그와 더불어 지적하는 것은, 한(조선)민족이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버리려는 제국주의 미국과 남(한국)의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공세를 물리칠 만큼 강력한 민족통일전선을 세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8.15 조국광복 이후 3년 역사가 주는 교훈은, 1994년에 제네바에서 채택된 조미 기본합의를 깨버리고 '핵문제'에 매달려있는 제국주의 미국과 친미예속세력이 벌이는 반동적 공세의 본질을 드러내준다. 또한 그 교훈은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이 벌어지는 오늘, 6.15 공동선언의 깃발 아래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전선을 세우는 과업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지를 거듭 깨우쳐준다.

6. 제국주의지배세력 안에서 생겨난 경쟁적 갈등

위에서 논한 대로,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는 것은, 전후 조선에서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면서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길러내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정책을 깨부수고 진보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길이었다.

나치독일에 자진하여 합병함으로써 전범국이 된 오스트리아가 전후 10년 동안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에 의해서 분할점령되었으면서도 미국이 오스트리아에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을 들이밀지 못했던 까닭은, 소련이 오스트리아에 대한 국제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을 후견하는 정책을 밀고 나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사회정치역량이 단합하여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웠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 칼 레너(Karl Renner, 1870-1950)를 수반으로 한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세워져, 10년 동안 전승국 네 나라의 분할점령 아래에 있다가 1955년에 영세중립화를 확정한 다음에야 완전한 주권국가로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전후 역사가 말해주듯이, 같은 시기에 소련과 미국에 의해서 분할점령된 조선이 예속, 분단, 전쟁을 피하고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루는 길은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미국이 모스크바 국제협정에 끼어 넣은 계략, 곧 소련, 미국, 영국, 중국이 조선에서 5년 이내로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계략은, 조선의 민족주체역량이 단합한 통일전선운동으로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고 그 힘에 의거하여 자주노선으로 나갈 때 깨부술 수 있었다. 전후 조선에서 그러한 사회정치적 발전을 국제적으로 보장한 것이 모스크바 국제협정이었다,

제국주의 미국은 자기가 분할점령한 조선에 자주적 통일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반대하였으므로, 그러한 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국제적으로 보장한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버리는 책동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한(조선)민족의 통일전선운동을 갈라놓고 짓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주의 미국이 벌인 모스크바 국제협정 파기책동과 민족통일전선운동 분열책동이 전후 조선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근로대중의 통일전선을 고립압살하는 책동과 함께 벌어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눈여겨보는 것은, 제국주의 미국이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버리는 책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까지, 제국주의지배세력 안에서 미묘한 갈등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갈등이 생긴 원인은 국무성과 육군성이 전후 조선에 대한 정책을 틀어쥐려고 경쟁을 벌인 데 있었다.

육군성은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그리고 전후 점령지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정치적 지위와 역할을 크게 강화하였으며, 해군성과 국무성을 견제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 점령정책을 주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에 대한 점령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집행하며 지배권을 행사하는 문제에 관하여 미국의 지배세력이 둘로 갈라져 경쟁적 갈등을 빚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육군장관 로버트 패터슨(Robert Porter Patterson, 1891-1952)과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는 육군성이 점령지에 대한 지배권을 배타적으로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가 국무성은 점령정책을 세우고 육군성은 지배권을 행사한다는 식으로 역할을 나누어 맡도록 조절하였던 시기에는 육군성과 국무성의 갈등이 물밑에 가라앉았다. 1946년 4월 17일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는 국무성이 맡아야 하는 점령정책을 이렇게 규정하였다.

1) 국제협정과 국제헌장 범위 안에서 미국의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 조정위원회는 점령지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조정한다.

2) 점령지라 함은 독일, 오지리(오스트리아-옮긴이), 일본, 조선을 가리킨다.

3) 점령지에서 미국군의 점령 및 통치에 관한 정책의 집행은 계속하여 육군성이 책임을 갖는다.

4) 점령지를 담당하는 국무차관보는 점령사항에 관한 정책조정에서 국무장관에 대하여 직접 책임을 진다.

5) 점령지를 담당하는 국무차관보는 연락위원회의 국무성 대표로서 검토해야 하는 점령정책사항 일체를 연락위원회에 보고하기 위하여 주동적 역할을 한다.

6) 국무성 중앙구라파국장이 관할하는 독일-오스트리아 사무국과 국무성 극동국장이 관할하는 조선-일본 사무국을 둔다.

7) 조선과 일본에 관한 점령정책은 국무성의 극동국장이 세운다.

8) 정책집행은 화부(워싱턴-옮긴이)에 있는 극동국장을 통하여 점령지에 전달되고 또는 그것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육군성을 통하여 맥아더에게 전달된다. (『서울신문』 1946년 4월 19일자, 4월 24일자)

제국주의지배세력이 서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틀어쥐려고 경쟁적 갈등을 벌이는 과정에서 혼란은 이어졌다. 군정청에 모스크바 국제협정문이 전달된 때는 1945년 12월 29일이었고, 그 협정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이 미국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도쿄의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부에 전달된 때는 이튿날인 12월 30일이었다. 그러나 군정청은 모스크바 국제협정에 관한 지침을 받고서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 군사고문단 정보일지(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G-2 Periodic Report)』에 따르면, 군정청은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는 문제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았고,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을 반대하였다고 한다.  

모스크바 삼국회담에 나가서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채택한 것은 육군성이 아니라 국무성이었으므로, 육군성이 자기가 서명하지 않은 그 협정을 외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는 육군성에게, 군정청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William Russell Langdon, 1891-1963)은 국무성에게 각각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을 중단해줄 것을 여러 차례 간곡히 요청하였다.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125쪽) 존 하지는 "1945년 말에 우리는 망명집단을 통해서 약간의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듯했으나, 모스크바 결정의 발표는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고 투덜거렸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301쪽) 군정청은 이처럼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외면하였으나, 1946년 3월 20일 모스크바 국제협정에 따라 제1차 소미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7. 통일전선을 가로막은 세력들

군정청은 지방인민위원회라는 통일전선체를 깨부수면서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통일전선 형성을 가로막았다. 군정청의 민족분열책동에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야합한 것은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었다. 그 세력의 대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김구다. 그는 일제 식민지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가로, 8.15 이후에는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통일민족주의자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으나, 통일전선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모습이 보인다.

이미 항일독립운동 시기부터 김구는 통일전선을 가로막은 분열주의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1923년 1월 해외민족주의세력이 거의 모두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열었을 때도, 1932년 11월 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될 때도 김구는 반대하였으며, 1935년 7월 중국과 미국에 흩어져 있는 민족주의세력들이 모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을 때도 김구는 반대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되던 시기에 김원봉(1898-1958)은 김구에게 조선민족혁명당 위원장직과 군관학교 최고직책을 주는 조건으로 입당을 간청했으나, 김구는 혁명운동은 역량집중이 아니라 투쟁에 있다는 궤변을 내세우면서 거절하였다.

김구는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된 뒤에 고립되자 자기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을 앞세워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난하다가, 1935년 11월에 한인애국단을 내세워 한국국민당을 만들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인애국단 및 재미동포 독립운동단체를 모아 한국광복운동단체협의회를 조직하였다. 김원봉은 한국광복운동단체협의회를 이끄는 김구에게 통일전선을 형성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김구는 거절하였다.

김구는 1940년 4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해체되면서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중경 임시정부 의정원(입법기구-옮긴이)에 민족혁명당이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였던 김구는, 1941년 10월에 열린 제33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의장 김붕준(1888-1950)의 의사진행에 따라 조선민족혁명당 성원 27명이 의정원 의원으로 보선되자 중국헌병을 불러들여 보선된 의원들을 강제로 내쫓고 김붕준의 의장직과 의원직을 박탈하였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162-170쪽 참조)

이처럼 김구는 중국의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인 국민당과는 연대하면서도 김원봉이 대표한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손잡고 통일전선을 세우는 것을 거부하였다. 8.15 조국광복 후 귀국한 그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손잡고 통일전선을 세우는 것을 거부한 분열주의자로,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주동한 국수주의자로 나선 것은 조국광복 이전부터 쌓아온 그의 오랜 경력으로 보아서 당연한 결과였다. 심지어 김구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을 숙청해야 한다는 극언을 늘어놓기까지 하였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89쪽)

김구는 리승만을 중심으로 한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권력을 틀어쥐고 남조선 단독정부를 거의 세우게 된 1948년 4월에 가서야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뒤늦게 참석하였다. 김구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전환점으로 하여 통일전선운동에 나섬으로써 국수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 변신하였다.  

김구가 대표한 국수주의적 사회정치세력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과 손잡고 통일전선운동을 가로막았다. 그 세력이 내세운 주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에 바탕을 두고 과도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당각파 각계각층이 동참하는 통일전선운동과 배치되는 자리에서 자기들이 주도하는 정치회담을 통하여 과도정부를 세우려는 행동에 집착하였다. 그 행동은 1945년 9월 3일 아직 중국에 머물고 있던 김구가 당시 서울에 만들어놓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사무국을 통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긴급성명을 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성명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는데, 그 핵심내용은 임시정부를 세우는 네 단계로 정리된다. 그 네 단계는 임시정부의 주도로 국내외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와 저명한 정치인들이 모이는 영수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임시정부의 직능과 소유를 과도정부에게 이양→전국적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하는 정식정부 수립이었다.

김구는 이 긴급성명을 발표한 이튿날인 1945년 9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명단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명단에 따르면, 중경에 머물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내무부장 신익희(1894-1956), 외무부장 조소앙(1887-1958), 재무부장 조완구(1881-1954), 문화부장 김상덕(1892-1956), 선전부장 엄항섭(1898-1962), 군사부장 김원봉, 법무부장 최동오(1892-1963)를 비롯한 국무위원 14명과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의정원 의원 51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4일자)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존립근거를 잃어버렸다. 일제가 거꾸러진 소식이 중경 임시정부에 전해진 직후인 1945년 8월 17일에 열린 제39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 신한민주당, 조선민족해방동맹을 한편으로 하고, 한국독립당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대 정파의 격렬한 다툼이 벌어졌다. 조선민족혁명당, 신한민주당,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요구하였고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귀국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다투었는데, 결국 위의 3개 정치단체 대표들이 의정원 의원직에서 모두 물러난다고 공표하고 퇴장하였다. (『의정원문서』 550-570쪽) 이로써 의정원은 자동적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의정원(입법기구)이 자동해산된 뒤로 임시정부에는 국무위원회(행정기구)만 남았는데, 의정원이 없는 임시정부는 사실상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1945년 11월 하순에 귀국한 김구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했으나, 당시 임시정부는 이미 의정원이 해산된 상태였으므로 정치적 실체로서 존립할 수 없었다.

8.15 정국에서 끈질기게 법통을 주장하였던 김구의 임시정부는 학병에서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를 찾아갔던 장준하(1918-1975)가 뒷날에 쓴 체험실록 『돌베개』에서 묘사하였던 것처럼, 노쇠한 망명객 몇 사람이 파벌다툼이나 일삼으면서 임시정부라는 빛바랜 간판을 지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구는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 전국환영대회'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우리 임시정부는 3.1 대혁명의 민족적 대류혈투쟁 중에서 산출한 유일무이한 정부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민족의 총의로 조직된 정부이었고 동시에 왜적의 조선통치에 대한 유일한 적대적 존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임시정부는 과거 27년 간 일대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전민족 총단결의 입장과 민주주의 원칙을 일관하게 고수하여 왔던 것입니다. 임시정부는 결코 어느 한 계급 어느 한 당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민족 각계급 각당파의 공동한 이해립장에 입각한 민주단결의 정부이었습니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19일자)

자기들이 주도하여 정치권 상층부에 국한된 정치회담을 내오고 거기에서 중경 임시정부의 직능을 확대개편하는 방식으로 과도정부를 세우려 했던 김구 중심의 국수주의적 사회정치세력이 내밀었던 정책은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동참하는 통일전선을 세우는 데서 걸림돌이 되었다.

통일전선운동을 가로막은 또 다른 세력은 친일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이끈 한국민주당이었다. 1945년 9월 8일부터 한국민주당은 김구의 임시정부를 무조건 옹호지지하였다. 그들은 김구 중심의 국수주의적 사회정치세력이 중경 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하자마자 "독립운동의 결정이요 국제적으로 승인된 재외 우리 임시정부를 부인하는 도배"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945년 12월 6일에 이르자 그들은 김구의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는 전국민운동을 전개하여 국제승인을 촉진할 것"을 결의하고, 군정청에게 "내정에 대한 모든 기관을 임시정부에 위양하여 정부의 위신을 유지케 할 것과 독립완성을 방해하는 참칭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하여 즉시 해산명령을 발할 것과 국방과 치안을 확보하기 위하여 광복군을 급속 정비강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7일자)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1889-1945)는 통일전선문제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김구의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면 통일전선이 세워진다고 하면서 "유일이요 또 최고인 임시정부를 전민중이 지지협력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9일자)

친일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이끈 한국민주당이 이처럼 창당되기 전부터 김구의 임시정부를 무조건 옹호지지한 까닭은, 일제가 물러가자 기가 꺾였던 그 세력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보적 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결집한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의 통일전선운동을 가로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전후 조선에서 봉건유제가 부셔지고 진보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친일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집합체인 한국민주당이 몰락하는 것을 뜻하였다. 왜냐하면 한국민주당은 지주-소작제라는 봉건유제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친일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정치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세워지고 그에 의해서 진보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곧 친일파 민족반역세력을 몰락시키는 것이었으며,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지주-소작제라는 봉건유제에 묶여있던 낡은 농업생산체제를 민주주의적으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한국민주당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에 대해서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나선 일본제국의 주구들"이라는 극언을 토해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945년 9월 16일 리승만, 김구, 서재필(1866-1951), 오세창(1864-1953) 등 일곱 사람을 영수로 추대하면서 창당된 한국민주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의 정치적 진출과 통일전선운동의 전진추세를 자기들의 단독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되자, 김구 중심의 국수주의적 사회정치세력과 손잡고 협공을 벌였다.

8. 세 갈래 사회정치세력의 야합

리승만을 대표로 하는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움직임은 1945년 10월 23일 서울의 조선호텔에서 약 2백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라는 정치조직을 내오기로 결정한 때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서 리승만은 김구의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임시정부를 가진 사람이오. 그 임시정부를 떠받들고 있는 사람들은 피를 흘려 싸워온 사람들이오, 각국의 승인을 받은 터이다. 그 분들도 하루 바삐 고국에 돌아와 여러분과 손을 잡고 함께 우리들의 굳센 나라를 세우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김구 선생은 명예나 권리를 원하고 있는 분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모르신 분이다. 전 인민이 좋은 정부를 조직하면 거기에 따라 가실 분이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8일자) 리승만은 이처럼 김구를 추켜세우는 것에서 한 술 더 떠서 "나는 중경임시정부의 한 사람이다. 임시정부가 들어와서 정식타협이 있기 전에는 아무런 데도 관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8일자)

임시정부 간판을 든 국수주의적 사회정치세력, 한국민주당 간판을 든 친일반동적 사회정치세력, 그리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간판을 든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은 인민대중의 통일전선운동을 가로막으려는 세 갈래의 사회정치세력이었다. 그 세력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여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의 통일전선운동을 떠밀고 가는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에 맞서 싸움을 벌였다. 그 싸움은 리승만을 대표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결성되는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성식에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참석한 이현상(1906-1953)은 전후 조선이 직면한 정치문제는 "임시정부(중경 임시정부-옮긴이)를 모셔다가 개조하느냐 그대로 두느냐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더욱 강화시켜 국내 해외를 망라하여 재조직하느냐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인민의 소리가 즉 정치"라고 말하였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8일자) 그의 견해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결집된 통일전선을 세우려 한 인민대중의 요구를 대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을 대표하여 참석한 원세훈(1887-1959)은 이현상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원세훈은 "통일전선에는 기본조건이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8일자) 그의 발언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각계각층 인민대중의 정치적 진출을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된 한국민주당이 김구의 국수주의적 사회정치세력과 야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다른 한 편에서, 리승만 중심의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은 모스크바 국제협정 반대투쟁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리승만은 자기 숙소인 돈암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는 바이오.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도 이 제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30일자) 리승만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이 자치능력이 없다고 악선전을 하면서 국제신탁통치론을 들고 나왔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40여 년 동안 남의 노예가 된 것도 우리가 원한 바가 아닌데, 이제 다시 여러 상전을 모시게 되면 큰 일이다. 그러니까 하루 빨리 자주독립의 국가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말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8일자)

중경 임시정부, 한국민주당,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벌이는 통일전선 방해책동은 '조선의 즉시 독립'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러나 '조선의 즉시 독립'이라는 대중선동구호는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반대하는 것을 공동목표로 하여 야합한 세 갈래 사회정치세력이 자기들의 반동적 정체를 위장한 명분이었다.

1945년 11월 2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기 위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김구의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국제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이 채택되었으며(『자유신문』 1945년 11월 3일자), 11월 5일 기자회견에 나선 리승만은 "물론 민족반역자나 친일파는 일소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우리의 힘을 뭉쳐 놓고 볼 일이다. 그러한 불순분자를 지금 당장 외국인의 손으로 처벌하여 주기를 우리는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친일파 민족반역세력이 통일전선운동을 방해한다면 비극의 뿌리가 되므로 첫째 문제가 그 세력을 숙청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기자의 말에 대해 리승만은 횡설수설하면서 친일파 민족반역세력을 이렇게 옹호하였다. "지금은 누가 친일파고 누가 반역자인지 모르겠다. 여러분이 서면으로 그것을 밝혀 알으켜 주기 바란다. 그렇게 되면 통일전선기관의 구성분자를 전형할 때 큰 도움이 되겠다. 또 대중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도 나에게 서면으로 들려주기 바란다." (『매일신보』 1945년 11월 6일자)

그 무렵 리승만은 아직 서울에 들어오지 못한 김구의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으나, 그가 김구의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밝힌 진짜 목적은 자신의 친미예속적 정체를 '조선의 즉시 독립'을 요구하는 애국자의 가면으로 위장하려는 데 있었다. 리승만은 미국이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정책을 수행하는 데서 국수주의자 김구의 이용가치가 별로 없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리승만의 친미예속적 정체는 제국주의 미국이 전후 조선에서 집요하게 내밀었던 두 가지 정책, 곧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버리고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가로막는 저지정책, 그리고 친일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옹호하고 그들을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으로 키우는 육성정책에 전적으로 들어맞는 것이었다. 김구, 리승만, 김성수로 대표되는 세 갈래의 사회정치세력의 야합은 그렇게 생겨났다.

9. 국무성의 3단계 방안과 군정청의 좌우합작공작

1946년 4월 6일 미국의 『합동통신(Associated Press)』이 샌프란시스코발로 내보낸 기사 한 편 때문에 서울의 분위기는 뒤숭숭하였다. 문제의 기사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서울에서 열린 소미 공동위원회에서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는 문제가 풀리지 않게 되자 군정청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2)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군정청의 계획에 따르면, "미국인은 자문격으로 참여하여 전면적으로 지도하고 조선문제는 조선인에게 일임한다"는 것이다.

3)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물러난 리승만은 남조선 단독정부의 주석이 될 것이다.

4) 미국이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까닭은, "소련 측이 정치적 이유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지연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며, 미국군의 계획에 따라 남조선을 점령한 미국군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1946년 4월 7일자)

국무성은 모스크바 국제협정에 따라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을 내밀려고 하는데 반하여, 분할점령정책을 붙들고 있는 군정청은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군정청은 김구의 국수주의적 사회정치세력과 리승만의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광적으로 벌인 이른바 반탁운동을 내버려두었으나, 국무성은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반탁운동을 반대하였다.

『국무성 비밀외교문서』에 따르면, 국무성은 1946년 2월 말 조선에 대한 정책지침을 육군성을 통하여 도쿄의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부에게 보내면서 군정청이 반탁운동을 벌이는 김구와 리승만에게 결코 어떠한 호의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고 한다. 제1차 소미 공동위원회가 중단된 뒤인 1946년 5월 22일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는 반탁운동의 주동자인 김구를 배제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1946년 6월 6일 국무성 점령지구담당차관보 존 힐드링(John H. Hildring)이 육군성 작전처에 보낸 조선정책각서는 "자발적인 정계은퇴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늙은 망명객들을 거세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 각서는 김구와 리승만이 "정계에 남아있는 것은 소련과의 합의를 점점 어렵게 할 것이며, 소련이 반소적인 그들을 모스크바 결의에 따른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국무성은 리승만과 김구가 중심이 된 반탁운동세력을 지지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을 내세우라는 새로운 정책지침을 군정청에 보냈다. 1946년 7월 국무성은 6월 6일의 조선정책각서를 다시 확인하는 내용의 정책지침을 군정청에 보내면서 리승만과 김구가 중심이 된 반탁운동세력에 대한 지지 철회→중도적 사회정치세력에 대한 지지→과도입법기구 설립으로 이어지는 3단계 방안을 내놓았다. (『미국 군사고문단 정보일지』 2, 186-187쪽)

국무성이 작성한 3단계 방안은 당시 남조선에서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의 통일전선을 교란하고, 근로대중의 반군정투쟁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다가선 남조선의 혁명적 정세를 개량화하고, 남조선의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을 친미개량주의(pro-American reformism)로 끌고 가려는 고도의 정치음모였다. 국무성이 구상하고 추구하였던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친미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정부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정치음모는 같은 시기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부가 점령한 일본에서 극우파쇼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제거되고,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권력을 틀어쥐었던 과정과 비슷하였다.

『국무성 비밀외교문서』에 따르면, 1946년 10월 초순, 군정청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이 소미 공동위원회 소련측 위원 제라심 발라사노프(Gerasim M. Balasanov)에게 미국은 리승만과 김구를 내세워 임시정부를 세우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말해주었다고 한다. 남조선에서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의 통일전선을 교란하고 혁명적 정세를 개량화하려는 국무성의 정치음모는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의 지역통일전선운동을 군정청의 좌우합작공작으로 변질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육군성과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부의 지시를 받는 군정청은 국무성의 좌우합작공작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의 정치보좌관 육군 중위 레널드 버치(Leonard Bertsch)가 좌우합작공작에 나섰을 뿐이다.     

10. 제국주의지배정책이 조절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1947년의 정세변화

급진적 사회주의세력이나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집권하는 것을 사전에 막고, 여운형 중심의 진보적 민주주의세력과 김규식(1877-1950) 중심의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이 공동으로 집권하도록 하여 결국 친미개량주의정부를 세우려던 국무성의 정치음모는 1947년에 이르러 결국 막을 내렸다. 1947년에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미국이 전후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지배정책을 그 무렵에 조절완성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워싱턴에서 일어났던 두 가지 사건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 전후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의 정책은 1947년 3월 12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연방의회 상하원 합동연설회에서 발표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에서 드러났다. 그 연설은 전후에 미국이 어떠한 제국주의지배정책을 내밀 것인가를 밝힌 것이었다. 트루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드러낸 대로, 조셉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할 만큼 극단적인 반공산주의에 젖어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트루먼 독트린'이란 제국주의 미국이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스, 터키, 이란, 베트남, 조선, 일본으로 길게 이어지는 이른바 '반공산주의 방파제(anti-Communist bulwark)'를 만들어놓으려는 세계지배정책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한 '반공산주의 방파제'를 만들어놓음으로써 사회주의 소련에 대한 이른바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이 시작되었다. 소련에 대한 봉쇄가 불러일으킨 냉전(cold war)이 '트루먼 독트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까닭이 그것이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1947년에 이르러, 세계 곳곳에서는 사회주의 소련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이 날카롭게 벌어졌다.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 1880-1959)은 아시아와 유럽에서 사회주의의 확장을 막고 민족해방운동을 짓누르려는 제국주의적 '봉쇄정책'을 작성하였다. 그에 따라 1947년 3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네 나라 외상회의에서 소련 대 미국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미국이 유럽에서 내밀었던 '봉쇄정책'은 국무장관 조지 마샬이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발표하고 7월부터 실시한, '마샬계획(Marshall Plan)'으로 세상에 알려진 '유럽복구계획(Europe Recovery Program)'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947년 8월 미국은 남조선에 대한 경제원조안을 결정하였으며, 12월에는 그리스의 친미적 반동정부에 4억 달러 경제원조를 대주고 군사고문단을 보냈다. 이러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추진에 맞서 소련은 1947년 9월 유럽 공산당들의 국제정보연락기구인 코민포름(Communist Information Bureau)을 내왔다.

1947년의 정세는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정책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을 세워야 하는 매우 절박한 문제를 한(조선)민족에게 제기하였다. 1947년의 정세는 제국주의 미국이 내밀었던 세계지배정책의 움직임, 전후 조선에서 일어난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움직임, 그리고 제국주의 미국과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에 맞서 싸우는 통일전선운동의 움직임, 이러한 세 갈래 움직임의 상관관계 속에서 대립과 투쟁을 불러일으키며 숨가쁘게 펼쳐졌다.

2) 점령지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지배정책은, 1947년 1월 제임스 번즈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에 임명된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조지 마샬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마샬은 점령지에 대한 육군성의 지배권을 국무성이 넘겨받아야 하며, 점령군은 점령지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경찰역할만 맡아보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5월 10일자) 마샬은 조선에 대한 행정책임은 국무성이 맡게 되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9일자)

1947년 1월 29일 조지 마샬은 국무장관에 임명되자마자 남조선에 '확실한(definite) 정부'를 세워 남조선 경제와 일본 경제를 연결하는 정책을 내올 것을 국무성 극동국장 존 빈센트에게 지시하였다.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122쪽) 조지 마샬이 지휘하는 국무성이 주도하여 1947년 2월에 만들어진 것이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의 '조선에 관한 성간(省間) 특별위원회(Special Interdepartmental Committee on Korea)'다.

국무성은 조선을 분할점령한 육군성이 미국의 전후 조선정책을 주도해온 것을 반대하면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틀어쥐기 위하여 새로운 대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대안은 국무성의 요청에 따라 1947년 3월에 작성된 「조선에 관한 성간 특별위원회 보고서」에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는 소련과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남조선 단독정부를 승인하고, 조선문제를 외상회의나 유엔에 넘기며, 남조선에 대한 공격적이고도 적극적인 계획을 채택하는 것을 논하였으며, 소련과 협조가 이루어지는 경우, 조선임시정부를 세우거나 또는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고, 소련군과 미국군을 상호철군하는 것과, 소련과 합의하여 조선문제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넘기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신복룡, 김원덕 편역, 『한국분단보고서』 하권, 323-335쪽 참조)

1947년 4월 8일 국무장관 조지 마샬은 소련, 영국, 중국에 보낸, 소미 공동위원회를 다시 열자는 내용의 문서에서 소미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리지 않을 경우, 미국은 "이 협정(모스크바 국제협정-옮긴이)의 목적을 조장시킬 조치를 남조선에서 단독적으로 취할 수밖에는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15일자) 워싱턴을 다녀온 존 하지는 1947년 4월 5일 서울에서 귀임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것,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워싱턴에서 논의되고 있으나 자신은 그 정책에 관하여 발표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차츰 명백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미국이 만일 조선에서 소련과 협력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 "미국은 단독적으로 책임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경향신문』 1947년 4월 8일자)

국무성이 논의하기 시작한 또 다른 새로운 정책이란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중심에 내세워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는 정책이었다. 1947년 3월 10일 국무성 점령지구담당차관보 존 힐드링은 워싱턴에서 행한 연설에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정책을 내비쳤다. (『합동통신』 1947년 3월 17일자) 국무성의 그러한 정책은, 소미 공동위원회가 합의에 실패하는 경우,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운다는 국무장관 조지 마샬의 발언(『서울신문』 1947년 5월 6일자)에서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의 조선에 관한 성간 특별위원회는 이처럼 조선임시정부 수립안과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안을 모두 가능한 대안으로 놓고 정책을 논의하고 있었으나, 최종 결정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1947년 7월 12일 트루먼은 육군참모총장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 1897-1989)를 대통령 특사로 임명하여 조선과 중국에 파견하였다. 그가 조선에 들어간 때는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가 이미 파탄에 빠진 8월 26일이었다. (『연표 한국현대사』, 728, 730, 778쪽)

11. 통일전선운동의 위기와 기회가 엇갈린 1947년

전후 조선에서 민족통일전선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 때는 1947년 6월이었다. 군정청은 소미 공동위원회를 반대하는 리승만, 김구, 김성수, 장덕수(1895-1947) 같은 반탁운동세력의 대표자들을 설득하면서(『조선일보』 1947년 5월 21일자), 북조선소련군사령부와 합의하여 1947년 5월 21일에 서울에서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를 열었다.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일정한 수준에서 이행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남북조선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협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는 소미 공동위원회의 국제적 보장을 통해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길이 열려진 것을 뜻하였다.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에서는 '남북조선에 소재하는 민주정당 및 사회단체와의 협의방법',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구성 및 원칙', '장래의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정강'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하고 남북의 각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그 합의안을 협의하기 위한 규정을 1947년 6월 12일에 발표하였다. 당시 남조선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한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 공동결의 제6호는, 모스크바 국제협정에 따라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고 그 임시정부의 주동적 역할에 의해서 북위 38도선에 그어진 분할경계선을 없애고 조선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룸으로써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자주적 통일정부로 발전시켜나가려는 한(조선)민족의 정치적 요구에 들어맞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1947년 6월 12일자) 소련이 소미 공동위원회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한 결과 이러한 진전이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군정청은 조병옥(1984-1960), 김병로(1888-1964) 같은 군정청의 조선인 요인들을 앞세우거나(『동아일보』 1947년 6월 14일자), 소미 공동위원회 미국측 대표인 소장 앨버트 브라운(Albert C. Brown)이 직접 리승만을 만나 소미 공동위원회에 참가하도록 권고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6월 17일자)

군정청은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 곧 네 단계를 거쳐 임시정부를 세우는 방안을 발표하고, 그 협정은 "조선이 통일국가로서 자주독립을 완수하고 또 이를 보증하는 한 기관(소미 공동위원회를 뜻함-옮긴이)을 준비한 유일한 국제조약"이라고 지적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6월 16일자)

1947년 6월 22일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협의에 참가할 남북의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 명단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경향신문』 1947년 6월 22일자), 6월 25일에 개최될 소미 공동위원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정식서명한 남조선 정당 및 사회단체는 2백69개였다. (『경향신문』 1947년 6월 25일자) 6월 30일에는 평양에서 북조선 정당 및 사회단체와 소미 공동위원회의 합동회의가 열렸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1일자) 7월 9일에는 3백99개에 이르는 남조선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소미 공동위원회 자문에 대한 답신을 제출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7월 9일자)

이러한 정세의 흐름을 타고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1) 군정청이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를 통하여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려고 하자, 그 협정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깨버리려고 하였던 리승만과 군정청 사이에서는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존 하지와 갈등을 빚은 리승만이 성명을 발표한 것(『조선일보』 1947년 7월 4일자)은 그러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7년 하지의 정치고문 조셉 제이콥스(Joseph Jacobs)는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리승만을 가리켜 "우리의 살 속에 박힌 생선가시"라고 표현하였다. (송남헌, 『해방3년사』, 제2권, 345쪽)

2) 이른바 '국제신탁통치 반대'라는 거짓명분을 부르짖으며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거부하여왔던 김구의 한국독립당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났다.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소미 공동위원회의 협의에 참가하려는 이른바 '혁신파'와 '민주파'가 끝까지 참가를 거부하는 이른바 '구임정계'와 갈라진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22일자)

바야흐로 조선의 정치정세는 민족통일전선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는 쪽으로 차츰 기울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리승만과 김구는 그러한 대세를 거스르는 길로 나아갔다. 리승만은 『뉴욕타임스』와 회견하면서(『서울신문』 1947년 6월 21일자), 김구는 한국독립당 당원에게 고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조선일보』 1947년 6월 25일자), 자신을 따르는 세력이 소미 공동위원회의 협의에 참가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의 노력으로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가 합의되자 당황한 쪽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정책을 논의하고 있던 국무성이었다.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국무장관 조지 마샬이 제국주의봉쇄정책을 작성한 뒤로, 국무성은 미국의 주간지 『육해군연합보』가 1947년 6월말 논평을 통해 지적한 것(『서울신문』 1947년 7월 2일자)처럼, 전후 조선에서 소련에 대하여 강하게 맞서서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버리는 길을 찾고 있었다. 국무성은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를 중지시키고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버리고 조선문제를 유엔총회로 넘기려는 책동을 노골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 공동결의 제6호가 발표되던 1947년 6월 12일, 국무성은 조셉 제이콥스를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임명하여 서울에 들여보내 소미 공동위원회에 참가시켰다. (『경향신문』 1947년 6월 13일자)

몇 가지 문제에서 합의에 이르렀던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는 갑자기 1947년 7월 3일부터 협의대상을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 의견이 날카롭게 대립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13일자) 소미 공동위원회 미국 수석대표 앨버트 브라운은 7월 16일 소미 양측의 대립논점을 발표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7월 17일자) 미국의 태도는 날로 강경해져갔다. (『동아일보』 1947년 7월 19일자) 7월 22일 소미 공동위원회 소련 수석대표 테렌티 스티코프는 협의대상을 선정하는 문제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이 그 성명을 통해서 파헤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소미 공동위원회 협의에 참가하는 청원서를 제출한 남조선 사회단체들 가운데는 용산구자동차협회 같은 상업회사, 행정기관, 학원 등이 들어있거나, 회원 1백22만 명이 있는 토목건축동맹이라는 유령단체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2) 청원서를 제출한 남조선 사회단체 회원 총수는 7천만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은 남조선 어른 한 사람이 8개의 단체에 동시에 가입한 셈이었다. 이를테면 대한노동조합총연맹은 1백만1천7백90명의 맹원이 있다고 거짓으로 기록하였으며, 조선토건협회는 19만5천1백83명의 회원이 있다고 거짓으로 기록하였다.

3) 청원서를 제출한 남조선 정당과 사회단체들 가운데는 모스크바 국제협정과 소미 공동위원회를 반대하여 투쟁하는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있다는 것이다. 소련 대표는 그러한 정당 및 사회단체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 탈퇴하고 모스크바 국제협정과 소미 공동위원회에 대한 반대투쟁을 중지하는 경우에만 소미 공동위원회 협의에 참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4) 소련 대표는 소미 두 나라 대표가 합의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를 시작하자고 여러 차례 제의했고, 두 나라 대표가 합의하지 못한 정당 및 사회단체는 공동심사를 통해 협의대상 여부를 결정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미국 대표는 그 제의를 거부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8월 3일자)

1947년 7월 27일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은 서울과 각 도청소재지, 지방소도시들에서 '미소 공위 경축 임시정부 수립 촉진 인민대회'를 열었으나(『연표 한국현대사』, 743쪽),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8월 12일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에 참석한 미국 대표는 정당 및 사회단체와의 협의를 그만두자고 소련 대표에게 제안하였고, 소련 대표는 8월 28일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2.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버린 미국

조선을 분할점령한 미국이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버리는 책동은 1947년 8월 28일 미국 국무성이 소련에게 전후 조선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회담을 제안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워싱턴 사국회담으로 알려진 새로운 정치회담에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참가하는 것으로 되었는데, 영국과 중국은 찬의를 표시했고 소련은 응답하지 않다가 결국 거부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9월 7일, 9월 12일자)

워싱턴 사국회담은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깨려는 미국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으므로 소련이 그 제안을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련이 워싱턴 사국회담 제안을 당연히 거부하리라고 예상하였으면서도 미국이 그 제안을 내놓은 것은, 모스크바 국제협정에 따라 소미 공동위원회에서 다루어온 전후 조선문제를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으로 끌고 가기 위한 명분을 쌓으려는 고도의 정치음모였다. 미국언론 『연합통신』이 1947년 9월 5일 워싱턴발로 보도한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미국 당국은 조선에 관한 정돈상태를 유엔총회에 제기하여야 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2) 미국은 공동위원회에서 소련과 합의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워싱턴 사국회담을 제안하였다.

3) 워싱턴 사국회담이 열린다고 해도 소미 공동위원회 이상으로 조선문제 해결에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4) 워싱턴 사국회담을 제안한 것은 조선문제를 유엔에 넘기기 위한 차기 조치를 취하기 위해 외교경로를 밝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6일자)

미국언론 『합동통신』은 1947년 9월 3일자 워싱턴발 보도에서 미국이 내놓은 워싱턴 사국회담 개최안을 소련이 거부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국은 새로운 조선정책을 세우려고 한다고 보도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9월 4일자)

소련이 워싱턴 사국회담 제안을 거부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샬은 전후 조선문제와 관련하여 소련과 합의에 이를 수 없다고 하면서 조선문제를 유엔에 넘기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7년 9월 12일자) 그와 더불어 『뉴욕타임스』, 『뉴욕헤럴드트리뷴』, 『런던타임스』, 『이브닝스타』 같은 서방 주요언론들은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정치적 타협의 여지는 없어졌으며, 따라서 조선에서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미국은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고 남조선에 대한 대규모 재건계획을 추진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1947년 9월 12일, 9월 13일자 종합)

미국 국무성이 전후 조선에서 내밀려는 점령계획은 세 단계 계획이었다. 당시 미국의 『연합통신』이 워싱턴의 '권위 있는 소식통'을 인용하여 보도한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첫째 단계는, 조선문제를 유엔에 넘기고, 조선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유엔위원회를 설치하며,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도록 소련군과 미국군이 철군할 것을 소련에 제안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위의 과정을 소련이 거부하는 경우에 미국이 단독으로 밟아 가는 단계인데, 미국은 남조선 경제원조를 개시하는 것이다. 1947년 3월 15일 국무장관대리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1971), 육군장관 로버트 패터슨, 해군장관 제임스 포레스털(James V. Forrestal, 1892-1949)은 국무장관 마샬의 고문단이 작성하여 제출한, 미국군 점령 하의 남조선에 대한 경제원조에 관한 건의안을 심의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3월 21일자)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국무장관 조지 마샬이 남조선에 대한 거액의 차관 또는 증여에 대한 필요성을 논하였던 때는 1947년 4월 27일이었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29일자) 『뉴욕타임스』 1947년 4월 24일자 기사는 미국 물자가 이미 남조선에 들어가는 중이라고 보도하였으며, 미국언론 『연합통신』은 국무장관 마샬이 "국무성과 육군성이 작성한 5억 4천만 달러의 조선원조안을 어느 때 의회에 제출할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할 것"이라고 보도하였고(『조선일보』 1947년 4월 29일자), 한국민주당은 미국이 남조선에 대해 6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단행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4월 26일자) 미국이 남조선 경제원조액을 1억1천만 달러로 결정한 때는 1947년 8월 1일이었다. (『연표 한국현대사』, 750쪽)

셋째 단계는, 1947년 12월 1일에 남조선 단독선거를 실시하며, 그 단독선거의 결과에 따라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서울신문』, 『동아일보』, 『경향신문』 1947년 9월 12일자 종합)

미국이 내놓은 워싱턴 사국회담 제안을 소련이 거부한 때로부터 불과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정치음모에 따라 다음 두 가지를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행동은 소미 공동위원회를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차관 로버트 로벳(Robert A. Lovett)은 9월 16일 소련 외상 몰로토프에게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넘기겠다고 통보하였다.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596쪽) 이튿날인 9월 17일에 열린 소미 공동위원회에서 소련 대표는 새로운 조항이나 논쟁적 조항을 내놓지 않았고, 따라서 양측의 견해가 거의 타결점에 이르게 되었는데도 미국은 억지를 부려 일방적으로 회담을 깨버렸다. (『서울신문』 1947년 9월 27일자)

두 번째 행동은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넘기겠다는 의도를 유엔총회에서 밝히는 것이었다. 소미 공동위원회가 미국에 의해서 깨졌던 9월 17일 국무장관 조지 마샬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조선문제를 유엔총회로 넘기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밝혔다. (『서울신문』 1947년 9월 20일자) 그로부터 나흘 뒤인 9월 21일 유엔총회 운영위원회는 조선문제를 유엔총회 의제에 넣자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23일자) 유엔총회에 참석한 "미국대표단은 국무성의 조선문제 전문가들이 작성한 다섯 개 문건을 가지고 유엔총회에서 조선문제를 처리하는 전략을 작성하기 위하여 종일토록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1947년 10월 8일자)

1947년 10월 17일 유엔총회에 참석하였던 미국대표들 가운데 한 사람인 노회한 외교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는 조선에 대한 국제신탁통치 실시정책을 포기하였다고 밝히고(『경향신문』 1947년 10월 19일자), 소련의 강한 반대를 따돌리고 조선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유엔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ygve Halvdan Lie, 1896-1968)에게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총선거를 감시할 유엔특별감시위원회를 내온다.

2) 유엔특별감시위원회는 인구비례대표제의 원칙에 따라 총선거에서 뽑을 대표의 수를 결정한다.

3) 총선거는 늦어도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실시한다.

4) 유엔특별감시위원회는 총선거가 끝난 뒤에도 조선에 남는다.

5) 총선거에 의하여 세워진 정부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군대를 설치한 뒤에 미소 양군점령을 끝내는 조치를 강구한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10월 19일자)

미국이 남조선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제국주의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가자 유엔총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한 외상 안드레이 비신스키(Andrey Vyshinsky, 1883-1954)는 미국이 그리스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친미예속정부를 세우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리스 방식을 조선에도 적용하려고 한다고 비난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10월 22일자)  

이처럼 미국이 제2차 소미 공동위원회를 중단시키기 위하여 억지를 부리며 말싸움만 벌여오던 중, 1947년 10월 28일 미국대표 존 덜레스는 유엔총회 정치안전보장이사회에서 "막부협정(모스크바 국제협정-옮긴이)에 의하여 설치된 미소공동위원회는 드디어 그 사명달성에 실패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10월 30일자)  

1947년 10월 30일 유엔총회 미국 대표 워런 오스틴(Warren R. Austin, 1877-1962)은 조선에 유엔감시위원회를 보내자는 결의안을 유엔총회 정치안전보장위원회에 내놓고 가결시켰다. (『동아일보』 1947년 11월 1일자) 그 위원회는 1947년 11월 5일 조선에 주둔하는 소미 두 나라 군대를 1948년 1월 1일까지 동시에 철군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부결시켰다. 소련은 유엔감시위원회 설치안에 대한 투표에 참가하지 않겠으며, 조선의 대표가 유엔총회에 참석하지 못한 조건에서 유엔총회가 조선문제를 토의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이 내놓은 유엔감시위원회 설치안이 마지막 표결에서 찬성 46표, 반대 0표로 가결되었다. (『서울신문』 1947년 11월 7일자)

이러한 정세변화에 대해서 남조선 언론들은 1947년 10월 23일자 『크리스천 싸이언스 모니터』 사설을 인용하여 이렇게 논평하였다. "조선인이 그다지 오랫동안 열렬히 희망하여온 독립이 실현될 가망은 적어도 더욱 희미하여진 것 같다. (줄임) 정세는 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10월 24일자)

제국주의 미국은 1947년 11월 14일 조선문제를 유엔총회로 끌고 가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11월 29일에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유엔총회에서 채택하였다. 1947년 11월에 조선 영토와 팔레스타인 영토를 갈라놓았던 제국주의 미국은 오늘도 여전히 한(조선)반도와 중동에서 제국주의지배정책을 내밀고 있다.

13.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정책과 반공산주의정책을 추종한 리승만

리승만은 1945년 12월 19일 『합동통신』을 통하여 미국 국무성에 권고문을 보냈다. 그 권고문에 나타난 리승만의 계략은 제국주의 미국의 반공산주의정책을 적극 추종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후 조선에서 반공산주의 정책을 내밀기 시작한 제국주의 미국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반공산주의적 태도를 뚜렷이 드러낸 것이다. 그는 "조선에 있어서 공산주의자의 활동만 보더라도 자유를 사랑하는 아메리카 국민의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미국 국무성에도 조선의 공산주의자를 지원하는 자가 있다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중앙신문』 1945년 12월 25일자)  

리승만은 1946년 3월 4일에 발표한 담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의심 없이 세계에 증명한 것은 한국이 지금은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다는 결심이다. 그 이유는 공산주의가 그르다는 말이 아니오, 다만 한인 공산분자들이 우리 독립광복을 반대하는 연고이다. (줄임) 우리 나라의 극소수인 공산분자 외에는 우리 한족이 모두 합심협력하여 통일(통일전선-옮긴이)을 이룬 것을 우리는 세계에 선언하나니 누구나 공산분자와 합동을 이루지 못하고는 통일(통일전선-옮긴이)이 될 수 없다 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곧 내 집에 불 놓는 자와 함께 일하라는 말과 같으니 될 수 없는 일이므로 불 놓는 사람이 주의(공산주의-옮긴이)를 그치기 전에는 합동될 수 없으며 그이들이 그 주의를 고집할 동안에는 평안히 살 수 없는 터이다." (『동아일보』 1945년 3월 6일자)

리승만은 반공산주의를 명분으로 하여 전후 조선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종하였다. 그는 『워싱턴스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발표하였다. "현재 전국민은 위대한 희생을 각오하고 통일민주적 조선공화국 건설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공연히 고의로 이에 장애를 주고 있는 것이다. 소련 점령군은 조선을 공산화시키려 하고 있으나 조선민중은 강제적 공산화에 대항할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세계평화와 번창을 위한 미국 민주주의 사상에 의하여 약소민족을 해방하고 민주주의화시킬 의사를 가진 미국민중에 희망을 가질 뿐이다." (『서울신문』 1946년 4월 16일자)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정책이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 길을 앞장서서 따라간 사람은 리승만이었다. 남(한국)의 역사가들은 리승만이 제국주의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을 적극 추종하여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대중선동을 개시한 것이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열린 연설회부터였다고 보았지만, 그것은 사실과 조금 다르다.

리승만은 정읍에서 연설하기 두 달 전인 4월 8일에 자기 숙소인 돈암장에서 열린 정례기자단 회의에서 "과도정권 수립의 선결조건으로써 38선 철폐를 주장하였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이상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의 보도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표명"함으로써 사실상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찬동하였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9일자) 여기에 나오는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의 보도'라는 것은, 1946년 4월 6일 미국의 『합동통신』이 샌프란시스코발로 보도한 것으로, 소미 공동위원회가 깨질 경우, 미국은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외신보도를 말한다. 그는 "나로는 모스크바 결의를 반대도 아니오 찬성도 아니며 (줄임)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서 독립정권을 행케 한다는 보도는 신문지상에서 보고 알았으나 (줄임) 이에 대하여 아직 나의 의견을 발표코자 아니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9일자) 당시는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이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정책으로 완전히 전환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리승만도 자기의 속셈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였다.

리승만은 제1차 소미 공동위원회가 무기한 중단되었던 1946년 5월 8일 나주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 못하면 우리는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피로써 싸우자"고 극렬히 선동하였고, 김규식은 1946년 5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연 독립전취국민대회에 나가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의사를 표명하였다. (『중앙신문』 1946년 5월 15일자) 이처럼 제1차 소미 공동위원회가 무기한 중단된 기회를 틈탄 군정청과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에 대한 탄압소동, 테러공격, 반소반공선동에 열을 올리는 가운데,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향한 리승만의 발걸음도 한층 빨라졌다.

14. 미국 국가정보기관의 비밀정치공작

리승만은 미국의 조선정책에 관한 정보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낼 수 있었다. 리승만에게 미국의 조선정책에 관한 정보를 넘겨준 사람은, 미국 육군 대령으로서 군정청 정치고문으로 일했던 밀러드 굿펠로우(Millard Preston Goodfellow)였다. 그는 1942년 초부터 미국에서 리승만과 국무성 관리들을 만나게 해주면서 리승만을 포섭하였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40쪽 참조) 굿펠로우에게 포섭된 리승만은 그를 자기의 '개인고문'으로 여길 만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굿펠로우는 1944년부터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 차장으로서 전략정보국과 육군성 사이의 연락업무를 맡아보았다. 전략정보국은 리승만에게 문관 대령의 계급을 주고, 암호명 '블랙(Black)'이라는 연락장교로 임명하여 굿펠로우 밑에서 연락업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리승만은 전략정보국 요원이었다.

전략정보국 요원 리승만이 미국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서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5년 9월 27일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가 도쿄의 정치고문 대리 조지 앳치슨 2세(George Atcheson, Jr.)에게 보낸 1945년 10월 25일자 문서는, 미국을 위하여 충성을 바치겠다는 리승만의 서약이 9월 27일자 국무성 문서 제1569호에 들어있다고 밝힌 바 있다. (김국태 옮김, 『미국무성 비밀외교문서』 제1권, 117쪽)

전략정보국 핵심요원들은 1947년에 개편창설된 중앙정보국에 들어가 요직을 차지하였다. 전략정보국 출신의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자기들과 함께 일했던 리승만과 비밀연계를 맺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략정보국 출신의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서북청년단을 앞세워 김구를 암살하였고(『한겨레신문』 1998년 8월 1일자 참조), 리승만을 앞세워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는 비밀정치공작을 벌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전시정보조직이었던 전략정보국은 1945년 10월 1일 해체되었으나, 정보공작역량은 전략정보실(Strategic Services Unit)→중앙정보단(Central Intelligence Group)으로 유지되다가, 1947년 트루먼에 의해 오늘의 중앙정보국으로 개편창설되었다.

전략정보국이 해체된 직후인 1945년 11월 7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굿펠로우를 '자기의 사적 대표'로 남조선에 보내겠다고 국무장관 번즈에게 밝혔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72-3쪽 참조) 미국 국무성 동아시아 분석관 존 메릴(John Merrill)은 굿펠로우가 트루먼의 '비공식 자문위원'이었다고 보았다. (『월간 다리』, 1989년 9월호)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트루먼은 굿펠로우를 통하여 리승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45년 10월 16일 굿펠로우는 맥아더가 빌려준 미군용기를 타고 리승만과 함께 남조선에 들어가자마자 하지의 추천을 받아, 김성수, 송진우 같은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대표자들을 모아놓은 이른바 '군정청 고문회의'를 조작하여 한국민주당의 핵심을 내세웠고, 1946년 2월 14일 리승만을 내세운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집합체인 이른바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을 내오는 공작을 벌였고, 남조선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을 갈라놓는 비밀공작을 벌였다. 군정청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는 국무장관에게 보낸 1946년 1월 28일자 1급 비밀문서에서 "굿펠로우는 지난 한 달 동안 조선의 정치단체들과 일해왔는데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미 김구와 리승만은 그들의 소위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하지 장군 및 공동위원회와 함께 일할 통일된 단체를 구성하려는 노력에 협력할 것을 동의하였"다고 적었다. (김국태 옮김, 『미국무성 비밀외교문서』 제1권, 213쪽)

1946년 4월 21일 굿펠로우는 "돌연히 여자비서 우라이를 대동하고 서울 김포비행장을 출발하여 공로로 대전비행장에 내린 후 자동차로 유성에 이르러 유성호텔에서 목하 38도 이남 각지를 순회시찰 중인 리승만을 회견하고 중요한 회담을 하였다. (줄임)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굿펠로우가 리승만과 함께 21일 오전 12시 유성온천을 출발하여 경남 부산으로 동행한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4월 23일자) 굿펠로우는 1946년 5월 13일에도 리승만의 숙소인 돈암장을 찾아가 "약 1시간 동안 중요한 협의를 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5월 14일자)

그 만남에서 굿펠로우는 리승만에게 소미 공동위원회가 깨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그에 따라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는 활동을 더욱 다그치라고 말해준 것으로 보인다. 비리사건에 휘말린 굿펠로우가 1946년 5월 24일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만일 미소 공동위원회 소련대표단이 조속히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경우, 미국은 남조선 단독정부의 구성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는 성명을 낸 사실(김국태 옮김, 『미국무성 비밀외교문서』 제1권, 288쪽)과 리승만이 6월 3일 정읍 연설에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강하게 주장한 사실이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1946년 12월 중순 굿펠로우는 리승만이 워싱턴에 만들어놓은 사조직과 다를 바 없는 조선위원회(Korean Commission)를 앞세워 연방상원의원, 언론인, 군정청 사법관, 대학교수 등을 선동하면서 리승만의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책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243쪽, 482-3쪽 참조,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324쪽 참조,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397쪽 참조)

이처럼 리승만은 굿펠로우를 통하여 전후 조선에 대한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이 조절전환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알아내고 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종하였다. 리승만은 굿펠로우의 뒤를 따라 1946년 12월 하순에 미국을 찾아갔고, 이듬해 4월까지 이른바 '비공식 조선사절단 단장'의 자격으로 미국에 머물렀다. 점령군방첩대(U.S. Counter-Intelligence Corps, CIC)가 1946년 12월 5일에 작성한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제국주의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이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방안으로 조절전환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시기에 맞춰 리승만이 미국을 방문하도록 이끈 사람도 굿펠로우였다. (G-2 Periodic Report, 제64호)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 날로부터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전략정보국 출신 핸스 토프트(Hans Tofte)가 중앙정보국 극동지구 정책조정실장에 임명되었다. 정책조정실(Office of Policy Coordination, OPC)은 간첩이나 무장요원을 침투시키는 비밀공작(covert operation)을 맡은 부서인데, 1953년의 이란 정부 전복, 1954년의 과테말라 정부 전복, 1961년의 쿠바 침공, 유(U)-2 첩보기 운영 같은 비밀공작은 모두 그들의 소행이었다. 극동지구 정책조정실장 토프트는 리승만의 측근 한철민을 중앙정보국 정책조정실 훈련소장에 임명하였다. (Lee Wha Rang, US CIA Operations in Korea, 1950-1955, Kimsoft.com 참조) 미국 국가정보기관과 리승만 사이의 비밀연계는 그렇게 형성되었던 것이다.

15. 단독정부 수립을 향하여 돌진한 리승만

미국에 머물던 리승만은 군정청이 공산주의운동과 반미선동에 유화적으로 대하면서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통일전선을 세우려고 힘쓰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서울신문』 1947년 2월 15일자), "조선 국내문제에 대한 미군정의 간섭을 점차 감소시키는 동시에 미국무성의 대조선정책을 명백히 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을 민주주의화하는 데 필수한 것이다. (줄임) 남조선을 민주주의로 구원하려면 우선 조선에 대한 국무성의 정책을 명백히 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26일자) 국무성에게 명백한 조선정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그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6개항의 제안을 국무성에 내놓았는데, 그 제안은 남조선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고, 미소 양군이 동시에 철군할 때까지 미국군대를 남조선에 계속 주둔시킬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12일자) 그는 워싱턴에서 성명을 발표하면서 남조선 단독선거로 세워질 남조선 단독정부가 군정청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공산주의자의 선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21일자)

그가 미국에 머물던 1947년 1월, 워싱턴에서는 국무장관이 바뀌고, 국무성이 분할점령정책을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방안으로 조절전환하기 시작하였다. 리승만은 현지에서 그러한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리승만은 1947년 3월 22일 남조선 단독정부가 30일에서 60일 안에 세워질 것이라고 말하였고(『조선일보』 1947년 4월 15일자), 같은 날 김구는 서울에서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리승만의 주장을 하루빨리 실현시켜 달라는 요지의 전문을 대통령 트루먼과 국무장관 마샬에게 보냈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24일자) 1947년 4월 23일 미국에서 돌아온 리승만은 곧 담화를 내고 이렇게 주장하였다.

"지난 1년 동안을 두고 정부수립에 노력하여 인내하여 왔으나 하나도 성사되지 못한 것은 미국의 완화정책으로 인하여 실패된 것인데 지금은 이 정책이 변경한 결과로 우리 총선거에 의하여 정부를 수립할 계획에 모든 장애가 다 빙소설해하게(얼음이 풀리고 눈이 녹는다는 뜻-옮긴이) 된 것입니다." (『경향신문』 1947년 4월 26일자)

리승만이 말한 미국의 실패한 완화정책이란 국제신탁통치 추진정책을 뜻하며, 그가 말한 미국의 새로운 정책이란 분할점령정책이 조절전환하여 만든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정책을 뜻한다. 리승만은 1947년 4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리승만 귀국환영대회에서 두 가지 의향을 내비쳤다.

1) 그 동안 지지옹호해온 김구의 임시정부를 부정함으로써 김구 중심의 국수주의적 사회정치세력과 갈라서고, 자신을 중심으로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긁어모아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의도다. 리승만은 "미국 정책의 전환에 따라 우리가 미군정과 합작해서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대한임정의 법통을 고집할 필요가 없으며 이 문제는 보류해두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신문』 1947년 4월 29일자)

2) 좌우합작운동을 깨부수려는 의도다. 리승만은 "김규식 박사도 이제는 합작을 단념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말했다. (『서울신문』 1947년 4월 29일자)

1947년 9월 4일 리승만, 김성수, 장덕수, 박순천(1898-1983)을 비롯한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대표자들은 마포숙사에서 남조선 단독선거에 대비한 제1차 회의를 가졌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6일자) 그 회의는 9월 8일과 9월 12일에도 열렸다. 그들은 미국이 소미 공동위원회를 그만두고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넘김으로써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책적 의도를 드러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중선동을 벌였다.

리승만은 조선신문기자협회 결성식에 나타나서 "미소공위나 만국회의에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정부가 아니"라고 하면서, 38도선 이북은 그만두고 경상도 하나만이라도 독립하기 위해서 남조선 단독선거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8월 12일자)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여론에 대해 리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남북이 통일해서 총선거를 하기 전에는 남조선에서만 총선거를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는 언론이 있으나 이는 사세를 떠나서 건국대업의 전도를 막는 공담일 뿐입니다. 우리 현상으로 38선 이남은 고사하고 다만 한 도나 한 군으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정치명의로 국제사회에 참가하여 언론권을 가져야 우리가 우방들의 협조를 얻어 남북통일을 촉성할 기회가 있을 것인데 이것을 아니하고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남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통일시켜 주기를 바라고 앉았다면 어불성설입니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4일자)

한국민주당은 소련을 제외하고 미국, 영국, 중국이 삼국회담을 열어서 조선문제를 토의하고 유엔으로 넘기라고 주장하였고, 조선민주당은 남북 총선거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자고 선동하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9월 13일자)

유엔총회 석상에 나타난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샬이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완전히 내던지고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넘기겠다고 연설하던 바로 그날, 리승만은 서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총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남북을 영영 나누자는 것이 아니오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국제 상에 발언권을 얻어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촉성할 문로를 열자는 것이며, 만일 이 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다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지마는 아무 다른 방식이 없는 경우에는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니 전민족이 합심해서 이것을 촉진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17일자)

그로부터 이틀 뒤, 리승만에게 질세라 김구도 긴급담화를 내놓았는데, 그는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정책을 평가하면서 "마샬 장관의 제의는 대서양헌장의 정신에 합치되는 것으로 3천만 한인은 물론 전세계 약소민족으로 하여금 미국의 선명하고 공정한 정책에 대한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칭송하고, "전민족적으로 마샬안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9월 20일자)

미국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넘겼던 1947년 9월 21일 리승만은 "미국 정부에서 지금에야 바른 길을 잡아서 나아가게 되었다. (줄임) 조선독립문제를 미국이 유엔에 제출하여 미 국무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려는 결심을 보이고 있으니 현지 미군정도 이에 호응하여 대조선정책을 실시하게 될 것이다. (줄임) 벌써 미국 친구들로부터 유엔 출마(유엔총회에 참석하는 조선대표로 나서는 것을 뜻함-옮긴이)를 종용받고 있으나 국내문제가 더 시급하므로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1947년 9월 21일자)

미국이 유엔총회 정치안전보장위원회에서 조선에 유엔감시위원회를 보내는 결의안을 가결시켰다는 사실이 보도된 직후, 리승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래와 같은 내용의 담화를 내놓았다.

1) "유엔대표단이 와서 남북총선거를 감시한다는 것은 소련이 불응하면 그 결과는 남한 총선거로 귀결될 것뿐"이다.

2) "북한 공산군이 남한침범을 준비한다는 보도가 자주 들리는 이때에 우리는 하루바삐 정부를 세워 국방군을 조직해 놓아야 남한이 적화되는 화를 막을 것이다."

3) "유엔의 여러 우방대표들은 우리 민의를 따라 해결하기를 주장한 바 남한에 정부수립이 하루바삐 되어 우리의 협조를 가져야 상당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을 인식하고 동정하는 친우가 많으니 우리 전민족은 이에 대하여 의혹치 말고 최속한도 내에 총선거 되기만 위하여 철저히 노력하면 우리 국권회복이 더 지연되지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 1947년 11월 5일자)

1947년 11월 30일 리승만과 김구는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문제에 관해 의견일치를 보았고, 12월 1일에 열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44차 임시회의에서 그 두 사람은 남조선 단독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을 촉구하였다. (『연표 한국현대사』, 876쪽)

16. 글을 마치며

일제의 식민지 강점에서 풀려난 한(조선)민족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정권의 낡은 소유관계를 변혁하고 생산수단의 낡은 소유관계를 개조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던 한(조선)민족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하였던 문제는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을 하나의 주체역량으로 아우르는 통일전선을 세우는 것이었다.

현대사가 증언하는 대로, 한(조선)민족은 온힘을 기울여 통일전선운동을 일으켜 세우는 싸움에 앞다투어 나섰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그 싸움은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이었으며,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제국주의지배를 끊어버리고 친미예속세력을 없애버리는 싸움이었다.

한(조선)민족은 희생을 무릅쓰고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완승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남(한국)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 제국주의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세력이 통일전선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단 1세대의 통일전선운동사가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이 벌어지는 오늘 분단 2세대와 3세대의 통일전선운동에게 주는 살아픈 교훈이다.

60년 전 한(조선)민족의 통일전선운동을 가로막았던 제국주의 미국은 오늘도 물밑에서 방해공작을 벌이고 있으며, 60년 전 진보적 민주정부 수립운동을 좌절시켰던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정책을 추종하면서 자주적 민주정부와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조선)민족의 통일전선운동은 단독정부 수립에 의해 실패와 좌절로 끝난 것이 아니며, 끝날 수도 없다. 명백하게도, 한(조선)민족의 통일전선운동은 60년 동안 계승발전되어왔다. 오늘 벌어지고 있는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은 60년 동안 계승발전되어온 통일전선운동의 긴 싸움이다. 제국주의 미국의 분할강점기에 분단 1세대는 통일전선운동사의 갈피마다 피와 눈물과 땀을 쏟았고, 오늘 분단 2세대와 3세대는 그 역사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불굴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대를 이어 계속되는 통일전선운동을 통하여 지난날의 진보적 민주정부 수립운동은 오늘의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운동과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운동으로 계승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60년 동안 이어지는 싸움에서 한(조선)민족이 최후 승리를 얻는 지름길은, 6.15 공동선언의 깃발 아래 남, 북, 해외의 민족주체역량이 결집한 6.15 공동위원회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힘있게 밀고 나가는 한편, 남(한국)에서 큰 덩어리의 통일전선체를 내오는 것이다.

올해 6.15 공동선언 발표 다섯 돌을 기념하여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과 8.15 조국광복 예순 돌을 기념하여 남측에서 열리는 민족통일행사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을 강화발전시키는 중대한 계기들이다. 그러한 발전추세에 발맞추어 남(한국)에서는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민중연대'와 '통일연대'를 통합함으로써 진보적 대중정당, 민족민주운동단체들, 근로대중단체들이 모두 결집한 새로운 지역통일전선체를 내와야 할 것이다.

21세기 통일전선운동은 8.15 조국광복 직후 남측에서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결집한 지역통일전선체가 완성되지 못하여 제국주의 미국의 분할강점을 끝내지 못했던 역사를 되새겨보면서 가르침을 얻는다. 2005년은 1947년이 그러했던 것처럼 통일전선운동의 기회와 위기가 엇갈리는 매우 중요한 때다. 기회와 위기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2005년 7월 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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