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 고 록]

 

 

우리가 백두산으로 나온 다음 장백땅이 자리잡고 있는 동변도, 특히 북부동변도일대는 관동군과 만주국 치안당국에 있어서 매우 골치 아픈 최대의 「치안불량지대」로 되었다.

일만군경의 모든 신경은 동변도로 쏠리게 되었다. 신문지상에는 장백땅의 소란스러운 사변들에 대한 기사들이 그칠새없이 나돌았다. 그전만 해도 치안양호지대로 치부되어왔던 백두산 기슭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다.

일본침략자들은 만주강점직후부터 조선과 함께 만주를 아시아제패의 전략적 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동변도의 치안에도 깊은 주목을 돌리었다.

동변도는 중국의 북양정부가 동북을 요녕, 길림, 흑룡강의 3개의 성과 10개의 도로 나누면서 생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서 지금의 길림성과 요녕성의 일부를 포괄하고 있는 넓은 지역이다. 동변도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잇닿아있으므로 「선만일체화」의 이념에 비추어볼 때에도 그렇고 엄청난 광물자원과 산림자원을 가지고 있는 경제적 측면으로 볼 때에도 그렇고 일만 정계와 실업계는 물론, 군부에 있어서도 특별한 관심을 모으게 되는 주요한 대상지의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가 이 지대의 북부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고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군사정치활동을 쉴사이없이 벌이게 되자 적들로서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바빠맞은 관동군은 동변도를 포함한 만주일대에 항구적인 치안대책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만주국치안숙정계획대강」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그에 기초하여 만주국정부는 「3개년 치안숙정계획요강」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거기서 가장 중심적인 특별공작대상지로 정한 것이 바로 북부동변도(장백, 임강, 무송, 동강, 휘남, 금천, 유하, 통화, 즙안현)였다. 만주국은 중앙에 「동변도 부흥위원회」, 통화에 「동변도 부흥판사처」와 「동변도 특별치안유지회」를 설치하는 한편 만주국 군부 최고고문인 사사끼를 우두머리로 하는 「통화토벌사령부」를 내오고 북부동변도의 치안확보를 겨냥하는 「동기대토벌」전을 개시하였다.

일본군부의 신경을 제일 날카롭게 자극한 것은 우리 인민혁명군부대들에 의하여 서간도땅에서 매일같이 울리고 있는 총소리와 그 뒤에서 도처에 건설되는 백두산 밀영망과 지하광복전선을 핵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혁명근거지었다.

이미 도쿄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최고통치자인 조선총독 미나미 육군대장과 만주의 사실상의 최고통치자인 관동군사령관 우에다육군대장으로 하여금 항일무장부대들을 완전소탕하고 치안을 도모할 수 있는 비상대책을 모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도문회담」이라고 부르는 악명높은 회담이 조만국경의 자그마한 세관도시 도문에 있는 일본영사관 분관의 밀실에서 열리었다. 이것만 보아도 얼마전까지 관동군사령관 겸 만주국주재 특명전권 대사로 있었던 미나미가 조선총독으로 부임되자마자 우에다와 함께 조선유격대 「토벌」문제를 놓고 얼마나 전전긍긍했는가를 가히 알 수 있다.

미나미와 우에다의 밀담에 이어 그 수행원들이었던 관동군헌병대사령관 도죠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쯔바시사이에도 회담이 진행되었다. 그 회담들에서 채택된 것이 바로 국경경비의 강화, 대규모적인 공동「토벌」작전의 전개, 서간도일대의 집단부락화를 골자로 하여 항일무장부대들의 압살을 노린 이른바「3대정책」이었다.

도죠와 미쯔바시사이에는 쌍방이 연합행동을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안이 토의되었다.

「3대정책」의 핵은 1936년 「동기대토벌」이었고 그 기본목표는 우리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는 백두산이었다.「동기대토벌」이 종전에 벌인 작전들과의 차이점은 만주로 출전한 조선주둔 일본군병력과 만주에 있는 관동군과의 혼성「토벌」작전이라는데 있었다. 그 전술은 대병력에 의한 포위에다가 참빗으로 머리를 빗듯이 산골짜기와 등성이를 샅샅이 훑는다는 새로운 비소식방법을 배합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그해 겨울을 마감으로 하여 항일무장부대들을 완전히 소멸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음흉한 목적밑에 조선총독부에서는 「치안유지와 국경경비의 강화」를 첫째가는 과업으로 내세우고 국경경비역량을 증강하고 방어시설을 확충하였으며 일본제국의 국가예산에서 막대한 추가자금까지 보장받도록 하였다. 조선주둔 일본군부대들과 특설국경경비대, 국경일대의 경찰부대들에는 대거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관동군측에서도 동변도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토벌」작전을 준비해  나갔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국경일대에는 각양각색의「토벌」부대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었다. 남부조선에 있던 경찰부대들도 북부의 산악지대로 이동하였다. 치치할에 있던 관동군부대들도 백두산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조선주둔 일본군 제19사단 산하 부대들도 또한 압록강을 건너왔다. 일만경찰부대들과 위만군 「토벌대」들도 우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압록강연안에는 경찰관주재소들이 부쩍 늘어났다. 곳곳에 단속초소들이 생겨났으며 강위로는 전화선들이 줄줄이 늘어졌다. 바로 이무렵부터 적들은 경찰관의 아내들까지 사격훈련을 시키었다. 달구지나 발구, 말파리 같은 것이나 겨우 드나들던 백두산 일대 산간오지의 오솔길들로는 대포바퀴와 치중마차들이 굴러다니게 되었고 밀림속 곳곳에 군마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지기 시작하였다.

백두밀림에는 그해 초겨울부터 「토벌대」들이 쫙 깔렸다. 적들은『이번의 토벌을 최종적인 것으로 하여 치안을 결정적으로 확립한다.』고 하면서 백두산일대의 밀림을 샅샅이 뒤졌다. 백두산기슭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일본침략군사이의 새로운 결전이 바야흐로 박두하고 있었다.

형세는 우리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우선 역량상으로도 적들은 대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항공대의 지원까지 받는 정예무력이 기본을 이루고 있었다. 적들은 행정, 경제, 경찰 등 모든 단위를 다 발동하고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발동시킬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인민의 은밀한 지원뿐이었다.

보편적인 군사 상식과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런 정황에서는 공격은 설정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기성관례와 상식을 뛰어넘어 공격위주의 새로운 우리 식 전법으로 적들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우리는 1936년 11월에 곰의골밀영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남호두회의이후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의 군사정치활동을 총화하는 한편 적의 「동기대토벌」공세를 격파하고 백두산근거지를 공고발전시키기 위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우리의 기본전략은 적의 양적, 기술적 우세를 사상적, 전술적 우세로 격파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전투원들의 사상적 각오를 고도로 높인데 기초하여 대부대활동과 소부대활동을 적절히 배합하면서 유인매복전과 불의의 기습전, 철벽의 방어전 그리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대오를 토막내어 소멸하는 전법 등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전술을 활용하여 매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의 영활한 군사작전에 의하여 적들은 「동기대토벌」의 첫걸음에서부터 골탕을 먹었다. 적들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압록강연안으로 나온 첫시기에는 우리가 반만군부대들처럼 거기서 겨울을 나지 못할 것이라고 타산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적들이 「토벌」을 강화하면 할수록 우리는 물러서지 않고 밀림속에 더 깊숙이 숨어서 신출귀몰의 수를 써가면서 백두산주변과 압록강연안 국경일대에서 더욱 맹렬한 군사정치활동을 벌여 적들을 수세에 몰아넣고 새로 꾸린 백두산근거지를 공고화해 나갔다.

적들에게 된매를 안긴 그해 겨울의 수많은 전투들가운데서 대표적인 것들을 들자면 곰의골어귀전투와 홍두산전투 그리고 도천리, 이명수 전투들을 꼽아야 할 것이다.

곰의골어귀전투는 우리 밀영에 대한 적들의 기습소탕작전을 앞질러 좌절시킨 방어전투였다.

「동기대토벌」의 첫시작에서부터 실패의 쓴맛을 톡톡히 본 적들은 한편으로는 군사작전을 강화하면서 다른편으로는 많은 밀정들을 파견하여 우리 사령부의 행방을 탐지하려고 하였다.

적들의 「동기대토벌」이 개시되자 나는 부대의 주력을 거느리고 주로 곰의골밀영쪽에 나가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대원 몇명을 데리고 전방초소에 나가 경계근무를 서던 오중흡이 농민옷차림을 한 수상한 사람들을 잡아가지고 밀영으로 돌아왔다. 조사하여보니 적들의 밀정들이었다. 그들은 수림속을 살금살금 헤치며 밀영쪽으로 접근해 오다가 미리부터 그 거동을 살피고 있던 우리 대원들에게 꼼짝 못하고 잡혔는데 능청스럽게도 일제놈들의 핍박에 못이겨 혁명군을 찾아온다고 하면서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행색이 하도 수상해서 몸을 뒤졌더니 한놈의 바지괴춤에서 날이 시퍼런 조막도끼가 나왔다. 그 도끼는 특무기관에서 살인흉기로 만든 것이었다. 심문결과 한놈은 행상으로 가장하고 이미 여러해 동안 밀정노릇을 해오는 악질적인 특무였고 다른 한사람은 순박한 농민인데 강박에 못이겨 길잡이로 그와 동행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이 받은 임무는 우리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어 뒤에서 밀림을 샅샅이 훑으며 올라오고 있는 「토벌대」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밀정의 진술에 의하면 적은 일만합동「토벌대」를 편성하였는데 그중 한 부대는 이도강을 떠나 곧바로 곰의골로 밀려오고 다른 한 부대는 16도구의 마가자 서북쪽을 거쳐 유격대밀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약속된 소리신호를 하게 되면 곧 공격을 하기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밀정은 이「토벌」을 회령에 있는 비행기들이 지원하게 되어있다고 하였다. 그의 진술은 우리 정찰조들이 수집한 정보자료와 일치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아직 포위환을 완전히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밀정을 통하여 사령부의 위치를 낌새맡은 적들은 결국 라남 19사단산하 일본군「토벌대」와 이도강에 주둔하고 있던 위만군 「토벌대」를 곰의골로 들이밀어 사령부와 우리의 주력을 불의에 타격함으로써  「불안의 화근」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정황은 매우 불리하고 위급하였다. 적들이 수색을 벌이면서 밀영으로 조여들고 있는 형편에서 우리는 밀영근처의 유리한 지대에서 적을 치고 슬쩍 빠져나갔다가 되돌아가는 적을 삼개골지대에서 밤을 이용하여 한번 더 때리기로 하였다.

곰의골의 남쪽은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적의 주력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골에는 잘룩한 병모가지처럼 묘하게 생긴 곳이 있었다. 이 골의 양쪽비탈은 경사가 몹시 급한 벼랑을 이루고 있어 벼랑을 잘 타는 산짐승들조차도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적들을 좁은 홈통속에 몰아넣고 족치기에는 둘도 없는 싸움터였다.

나는 2중대와 4중대를 서북쪽과 동북쪽 고지들에 매복시키고 골안 깊은곳에 허위진지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몇명의 대원들을 거기에 배치하여 마치 주력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불도 피우고 소리도 내게 하였다. 그런 다음 유인조를 파견하였다. 적진에 들어가 밤새껏 소란을 피우다가 날이 밝으면 대부대가 움직인 것 같은 흔적을 내면서 철수해 오라고 지시하였다.

날이 어슬어슬해질 때 유인조는 적진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의 추위가 몹시 맵짰다. 그러나 나는 매복위치를 숨기기 위하여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였다.

유인조는 적을 우리 주력이 배치되어있는 곳으로 끌어오려고 골바닥에 대부대가 지나간듯이 무질서한 발자국을 내면서 허위진지쪽으로 올라갔다. 잠시후에 그쪽 산비탈에서는 여러개의 우등불 연기가 솟구쳐오르고 떠들썩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든 것은 미리 짜준 유인각본에 따르는 기만동작이었다.

우리의 유인조를 뒤따라 골안에 기어든 적들의 신경은 우등불을 피워놓고 법썩 떠들어대는 허위진지쪽으로 쏠리기 마련이었다. 적의 척후대는 기마대열이었다. 잠시 한자리에 몰켜서서 골안쪽의 허위진지를 살펴보며 쑥덕거리던 기마척후대의 일행중에서 검정말을 탄 기병 하나가 말무리를 헤치고 나와 골짜기아래쪽으로 내달렸다. 다른 두필의 말도 그 말을 따라갔다.

반시간쯤 지나서 기마척후대는 길다란 보병종대를 달고 다시 골안에 나타났다. 종대의 선두마다에 말을 탄 장교들이 긴 군도를 번쩍거리며 오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라남 19사단 관하부대 패거리들이었다. 정안군장교들은 말을 얻어타지 못한째 병사들과 같이 걸어왔다. 적부대들의 뒷꼬리에는 박격포를 분해하여 기르마에 얹은 말들이 뒤따랐다. 다른 골로도 적들이 기어들었다. 분명 포위환을 형성하려는 것이었다. 100여명 되나마나한 우리 역량에 비하면 실로 5배도 더 되는 어마어마한「토벌」역량이었다.

이 전투에서 적을 타승할 수 있는 비결의 하나는 시간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적들이 포위진을 완성하기전에 1차 타격을 강하게 안기고 슬쩍 빠져서 다음 지점으로 이동해야 하였다. 우리는 밀정을 처단하는 총소리를 신호로 하여 적들에게 선제타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신호총소리와 함께 적들은 순식간에 풍지박산이 되었다. 대부분의 적들은 공격개시신호를 기다리다가 그대로 나가너부러졌다. 포탄이 장탄된 포들은 그냥 전장에 나딩굴었다. 곰의골어귀의 골짜기는 적들의 무덤으로 되고 말았다.

우리는 전장수색을 끝낸 다음 어둠을 타서 은밀히 빠져나왔다.

예견대로 정찰조원들은 패잔병들의 안내를 받으며 추격해 오던 적의 증원부대가 해가 지자 한곳에 몰켜 숙영준비를 하고 있다는 적정자료를 사령부에 통보해 주었다. 나는 오중흡에게 적숙영지를 야습하라는 과업을 주었다. 오중흡은 곧 1개 소대역량으로 습격조를 무었다. 야간습격전에는 많은 인원이 필요없었다.

습격조를 데리고 적의 숙영지로 은밀히 접근해 간 오중흡은 나무밑에서 졸고 있는 보초병을 사로잡아 간단한 심문을 하였다. 숙영지의 자리배치를 잘 알지 못하고 섣불리 쳐들어가면 짐군으로 끌려온 인민들이 피해를 당할 수 있었다. 보초는 입이 가분가분한 놈이었다. 그는 일본군대가 숙영지 복판을 차지하고 위만군이 그 두리에 잠자리를 잡았다는 것, 짐군으로 끌려온 인민들은 맨 바깥쪽에 총알받이가 될 수 있게 자리를 정해 주었다는 것을 실토하였다. 보초는 위만군들만 서고 조선에서 건너온 일본군은 우등불 곁에 젖은 신발들을 걸어놓고 말리우면서 곤하게 자고있다고 하였다.

오중흡은 습격조를 3명씩 나누어 순찰병으로 가장시켰다. 군호를 대면서 보초선을 무사히 통과하여 숙영지 한복판으로 깊숙이 들어간 습격조원들은 조단위로 일본군의 천막을 향해 불의에 사격을 들이댔다.

총소리에 놀라 깨어난 천막안의 적들은 신발도 찾아 신을 사이없이 헤덤벼쳤다. 적아를 가리지 못하고 제놈들끼리 향방없이 마구 쏴갈기는 눈먼총알에 숱한 장졸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너부러졌다. 숙영지안은 마치 벌둥지를 쑤셔놓은 것처럼 발칵 뒤집히었다. 습격조원들은 적이 혼란된 틈을 타서 전장밖으로 감쪽같이 빠져나왔다. 그날밤 적들은 저들끼리 밤새껏 총격전을 벌여 무리죽음을 내었다. 간신히 살아 도망친 적병들은 거의다 얼어죽고 말았다. 신발도 못신고 털외투도 못입은째 들고 뛴자들이 백두산의 혹한을 이겨낼리가 없었다.

패잔병들은 숙영지자리에 널려있는 수백구의 시체들을 그대로 다 운반할 수가 없어 머리만을 잘라서 마대에 넣어가지고는 마차에 처싣고 황황히 달아났다.

곰의골어귀전투가 있은 다음에도 우리는 압록강우안의 여러 고장들에서 맵시있는 전투들을 하였다. 11월 20일에는 적의 「토벌」거점의 하나인 장백현 14도구시가습격전투를 하였으며 그 며칠후에는 13도구 도천리 상촌에 있는 적을 기습소탕하였다. 일부 소부대들은 15도구와 19도구 일대에서 정치군사활동을 벌였다.

적들은 곰의골어귀전투와 뒷이어 계속된 전투들에서 얼마나 혼쌀이 났던지 그후 두석달동안 우리가 있는 백두산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토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적들은 시간을 얻어 새로운 「토벌」을 감행하려고 획책하였다. 우리는 경각성을 높이었다. 전부대가 밀정들의 침습을 막기 위하여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다른 한편 적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새로운 전술적 대책도 세웠다. 백두산 기슭에는 얼마동안 정적이 깃들었다.

내가 장백현 19도구 구장 이훈을 밀영에 불러다가 지하공작 방향과 방법에 대한 요령을 이야기한 것도 이 시기었고 원호물자를 지고 밀영에 온 17도구 인민들과 담화를 한 것도 이무렵이었다. 박달, 박인진과의 상봉, 조선인민혁명군 잠행조례의 공포, 조국광복회 조직들의 급속한 확대, 이 모든 사연들로 하여 1936년 말∼1937년초의 백두산지구 겨울은 우리의 기억속에 지금도 인상깊게 아로새겨져 있다.

그 기억의 한쪽모퉁이에는 장백현 19도구의 안덕훈농민도 있다. 안덕훈을 만나던 당시는 장백현일대에서 우리에 대한 신화같은 전설들이 파다하게 퍼져 김일성이 솔방울을 만지면 정말로 총알이 된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안덕훈은 그런 기담들에 유다른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가 자기 집 문턱을 넘어서기 바쁘게 대답하기가 매우 난처한 질문을 연거퍼 들이대었다. 다행히도 주인이 아랫방에 있는 김평을 대장으로 알고 그하고만 상대하였기때문에 나는 거기에 끼어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의 대화가 아주 해학적이었다.

『장군은 3일천기만이 아니라 훨씬 더 먼 앞날까지 환히 내다본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안덕훈이 김평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사실이구말구요.』

김평은 시치미를 떼고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안덕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새로운 질문을 들이댔다.

『웃마을 영감들이 그러는데 장군은 일이 있을 때는 눈을 뜨고 일이 없을 때는 눈을 감는다고 하더구만요. 그것도 사실이라고 믿어야 할까요?』

『네, 사실로 믿어도 됩니다. 장군은 일이 없을 때는 눈을 감지만 일단 눈을 뜨면 아예 큰 변이 나지요.』

『장군이 축지법을 쓴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사실이지요. 장군은 산을 주름잡아가지고 사방으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지요.』

『들리는 소문에는 김장군이 옛날의 홍길동이도 무색케 하는 신출귀몰의 장수라더니 과시 그렇구만.』

하나같이 어처구니없는 물음이고 또 그 물음에 못지 않게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으나 주인이 하도 정색해서 질문하고 손님이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정색해서 대답하는 바람에 나는 그 일문일답을 제지시킬 엄두도 내지 못하고 듣기만 하였다. 더욱이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평소에 그렇게도 솔직하고 고지식한 김평이 그런 엉터리없는 대답을 연방 둘러대면서도 전혀 어색해 하거나 면구스러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안덕훈은 김평에게 당신은 장군을 몇번이나 만나보았는가, 지금 김장군이 우리 마을에 와있는가고 물었다.

김평은 이번에도 자주 만나본다, 지금 김장군이 당신네 마을에 와있다고 주저없이 대답하였다.

주인이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 나는 김평에게 그런 싱거운 소리를 무엇때문에 하는가고 가볍게 나무랐다.

김평은 웃으면서 인민들이 전설을 믿으면 그 전설을 100프로 긍정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인민들이 우리 조선에 하늘이 낸 신비로운 장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장수가 나와서 나라를 찾아주었으면 하는 염원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고 그런 천출장수가 정말로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빼앗긴 나라를 꼭 되찾을 수 있다는 신심을 안고 우리를 따라 반일성전에 더 기운차게 떨쳐 나설 수 있을 것이기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동포들은 지금 일본놈들이 아무리 너덜거려도 우리 민족가운데는 신술에 도통한 장군이 있다, 그러니 왜적을 무서워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 김장군을 따라 싸우면 능히 조선을 독립시킬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건 사령관동지 일개인에 대한 숭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고 기대이지요. 인민이 그러기를 바라는데 굳이 아니라고 해서 맥을 떨구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김평의 말을 듣고 앞으로 군사작전을 더욱 대담하고 영활하게 벌여 인민의 기대와 신임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김평의 말과 같이 우리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에서 인민들은 큰 힘을 얻었다. 조선에 왜놈들을 쩔쩔매게 하는 장군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심신을 가다듬은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인민혁명군에 참군하였다. 털어놓고 말해서 우리는 이 민간설화들의 덕을 많이 본 셈이었다.

그후 안덕훈도 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다른 대원들 못지 않게 잘 싸우다가 몽강의 어느 전장에서 희생되었다. 이치호는 가랑잎과 눈으로 그를 안장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가슴아프게 추억하였다.

적들이 우리 밀영지들에 다시 범접하기 시작한 것은 새해 1937년에 접어들어서부터였다.

만주와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에 출몰하는 항일무장세력들을 일격에 소탕해 버리려던 기도가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일본의 소화천황은 군부의 제기를 수락하여 자기의 시종무관 시데이를 특별사신으로 파견하여 혁명군의 맹렬한 유격활동으로 하여 「치안유지」가 엉망이 돼버린 압록강연안의 국경일대를 한달동안이나 현지시찰하게 하는 동시에 조선총독 미나미와 관동군사령관 우에다 그리고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 고이소 등과 함께 인민혁명군에 대한「토벌」공세를 강화할 대책을 모의케 하였다. 어명을 받은 천황의 시종무관은 도쿄로부터 압록강상공으로 날아넘어왔다. 그의 행차를 계기로 적들은「토벌」에 더 열을 올렸다.

홍두산밀영에 대한 적들의 기습「토벌」은 시데이가 국경일대시찰을 한창 하고 있을 때에 단행되었다. 혁명군의 후방부성원들은 그때 음력설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의 기본전투부대들은 전방출전기지인 지양개밀영과 곰의골밀영에 나가있었고 나는 호위성원들과 함께 홍두산밀영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피치 못할 몇가지 사정이 있어 음력설을 이틀 앞두고 홍두산밀영을 떠났다.

나는 우선 홍두산과 횡산사이의 한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되골령밀영에 들려 김정부를 위문해 주고 백두산최후방밀영으로 향하였다. 잡지「삼천리」지면에 나타난 나와 김정부와의 회견이 있었던 고장이 바로 그 밀영이었다.

백두산최후방밀영이라고도 부른 횡산밀영에는 병약한 아동단원들이 보양생활을 하고 있는 귀틀막도 있었고 이계순, 박순일을 비롯한 병약자들과 환자들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병원도 있었으며 박영순이네 무기수리소와 박수환이네 재봉대도 있었다. 심장병때문에 신고하던 위증민도 그곳에서 요양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대통영감」을 비롯한 비서처 일꾼들도 「하늘아래 첫 동네」인 여기에 와서 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밀영에 있는 사람들의 사업과 생활형편을 요해하고 필요한 대책을 취해준 다음 김평, 권영벽을 비롯한 몇몇 군정간부들과 함께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먼저 곰의골군정간부회의후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군사정치활동을 총화하고 적의「동기대토벌」을 결정적으로 격파할데 대한 당면한 투쟁과업을 토의하였다. 특히 도천리, 이명수 계선과 무송지구에로의 전투부대들의 전술적 및 전략적 이동문제와 국내진공작전의 시기선택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그 문제는 훗날 서강회의에서 더 구체적으로 토의되었다.

회의에서는 다음으로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 당조직체계를 세우는 문제를 토의하였고 권영벽을 위원장으로 하고 이제순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장백현당위원회와 이제순을 책임자로 하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날의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 회의는 적의「동기대토벌」을 격파하고 백두산근거지를 지키는데서 뿐아니라 우리 나라 당조직건설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회의였다.

그 회의에 위증민도 참석하였다. 횡산에서 쇤 음력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박영순이 깡통으로 국수분틀을 만들어서 농마국수를 눌러 명절상에 올린 것이 바로 그 음력설이었다. 재봉대에서는 교즈를 빚고 병원사람들은 우동을 만들었다. 횡산사람들은 갖가지 진귀한 음식을 차려놓고 우리를 푸짐하게 대접하였다.

위증민은 그후 횡산밀영에서 나와 함께 농마국수를 맛있게 먹던 1937년 음력설을 두고두고 회상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영순의 재간을 칭찬하였다.

1937년 음력설을 생각할 때면 교방신이라는 중국인경위대원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 교방신은 교즈를 15개나 먹고도 국수 두그릇을 또 먹었다. 교방신네 다섯형제는 지양개에서 한날한시에 참군하였다. 그는 다섯형제중의 막내였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를 『쑈우즈』(다섯째)라고 불렀다.

그『쑈우즈』가 한번은 손에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면도칼로 그의 손을 수술해 주었다. 특별한 마취제도 없이 강짜로 한 수술이어서 몹시 아팠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용케 참았다. 수술자리가 잘 아물지 않아 교방신은 변소에 갔다가도 제 손으로 허리띠를 메지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매번 그를 거들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발이 젖으면 벗겨서 불에 말리워 주었다. 한번은 회의에 참가하려고 경위대원들과 함께 안도현 오도양차에 갔다가 변절자의 밀고로 적의 포위에 든적이 있었다. 그때 교방신이 아주 잘 싸웠는데 그 전투에서 아깝게도 그의 형 하나가 희생되었다.

횡산에서 음력설을 즐겁게 보내고 이튿날 홍두산밀영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망원초 쪽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리었다.

정황은 아주 긴박했고 형세는 우리에게 몹시 불리하였다. 우리의 병력이란 이두수네 중대원 몇명과 나를 호위할 임무를 맡고 있었던 기관총반원들뿐이었다. 적의 병력은 자그만치 500여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다가 우리 망원초에서 적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이미 적들이 우리를 제압할 수 있는 망원초고지에 거의다 오른 뒤였다.

나는 즉시 대원들에게 남쪽능선을 재빨리 차지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두수중대장에게 망원초에 있는 대원들을 철수시켜 적들에게 길을 열어주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철수하는 망원초성원들은 반드시 적들의 눈에 뜨이게 칼능선을 타고 내려오게 하였다. 칼능선은 한발자국이라도 헛디디면 깊은 골짜기의 눈속에 굴러떨어져 파묻힐 수 있는 외통길이었다. 그 외통길로 적들을 유인하게 되면 한사람이 100명, 1,000명도 능히 제낄 수 있었다. 홍두산남쪽능선은 칼능선으로 달려드는 적을 손금보듯 내려다보면서 답새길 수 있는 전술적 지탱점으로서 적들이 퇴각하면 능선아래 골바닥에 몰아넣고 모조리 족칠 수 있는 곳이었다.

나의 명령을 받은 망원초 성원들은 적들을 칼능선으로 유인하였다.

칼능선과 남쪽능선 사이의 골짜기는 문자 그대로 적들의  함정골로 되었다.우리의 승전을 도와준 또 하나의 요인은 명령을 받고 이두수가 남쪽능선의 비탈을 얼음강판으로 만들어놓은데 있었다. 그 얼음강판때문에 적들은 단 한놈도 우리가 차지한 능선으로 기어오를 수 없었다.

홍두산전투는 보통 군사상식으로 보면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역량상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을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우리측에서는 중대장 이두수가 총상을 당하여 후방병원으로 후송되었을 뿐이었다.

전투가 끝난 다음 나는 적들의 숙영지에 야간습격조를 파견하는 한편 무송쪽으로 빠져나가기 위한 대책을 세웠다. 적들이 일단 물러났지만 불원간 증원대를 끌고 다시 덤벼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인원이 너무 적어서 여기서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었다. 이런 때에는 슬쩍 빠져나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우리가 철수대책을 토의하고 있을 때 골아래쪽에서 우리 유격대의 돌격나팔소리가 울리고 연이어 요란한 총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오중흡이 인솔한 대오가 적들을 녹여내는 소리였다.

오중흡은 인민들로부터 적「토벌대」가 홍두산방향으로 밀려갔다는 말을 듣고 사령부의 안전이 걱정되어 천방지축 달려왔다. 그는 우리가 파견한 야간습격조와 함께 적의 숙영지 복판을 가로질러 몰사격으로 얼마 남지 않은 패잔병들마저 깡그리 요정냈다.

오중흡은 적을 족친 다음 한익수를 나에게 보내어 부대를 끌고 홍두산으로 들어오라는가고 물어왔다. 나는 홍두산밀영에 대한 적들의 습격이 완전히 좌절된 조건에서 본래 계획대로 움직일 것을 지시하였다. 오중흡은 우리의 지시를 받은후에도 사령부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곰의골로 되돌아갔다. 오중흡은 참으로 우리에게 충실한 사람이었다.

홍두산전투때 일본군의 짐을 지고 갔다가 적들의 송장처리까지 한 이도강의 한 농민은 훗날 우리의 답사단성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때 일본군대는 매 호당 한사람씩 인부를 강제징발했습니다. 한번 그런데로 끌려갔다오면 우리는 대개 발에 동상을 입고 심지어는 열발가락이 다 빠져버리기도 했습니다. 처음 끌려갔을 때는 겁이 났고 또 실지 전투마당에 엎드려있으면 온몸에 진땀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전투는 언제나 유격대의 승리로 끝났기때문에 속으로 는 어찌나 기뻤던지 피곤을 다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놈들이 도망쳐갈 때면 그 더러운 송장을 끌고 오라고 하는데 여간만 질색이 아니었습니다. 홍두산전투때만 해도 어찌나 시체가 많았던지 담가로 다 나를 수 없어서 죽은놈의 각반을 풀어 목을 매어서 질질 끌고 갔습니다.』

언제인가 나는 일본에서 우리를 찾아온 한 언론계 대표단일행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 키가 구척이나 되는 신문기자가 한명 끼어있었다. 접견석상에서는 내내 아무 말없이 기록만 하던 그가 오찬회때에야 불쑥 입을 열고 마음속에 감춰두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김주석은「백두산호랑이」로 소문났던분이기때문에 무서운 사람인줄 알았는데 오늘 만나보니 무척 인자하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가 홍두산전투에서 혼쌀난 옛 일본군 소위라고 실토하였다. 자기는 야습당하던 날 밤에 보초소검열을 나갔던 덕에 용케 생명을 건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살아나왔다고 하여 헌병놈들한테서 억울한 매도 맞고 된 봉변까지 당했는데 그때 속이 꼬여 군직을 버렸고 후에 기자로 돌았다고 하였다.

홍두산전투에 참가한 적군은 일만합동「토벌대」였다. 그런데 그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은 전부 일본군뿐이었고 위만군측에는 희생자가 별로 없었다.

일본군장교들은 위만군장교들을 보고 어떻게 되어 전투에서 죽은 것은 황군뿐이고 너희들만 고스란히 살아올 수 있었는가? 빨치산의 탄알에 황군만 따라다니는 지남철이라도 달려있단 말인가? 그런 지남철은 없다. 그러니 너희들이 살아온 것은 분명히 유격대와 내통하고 있는 증거라고 하면서 마구 때리고 차고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홍두산에서 엄청나게 많은 적과 싸워 이길 수 있은 주되는 요인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우리 사람들의 강한 정신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승의 신념, 백절불굴의 투쟁정신,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 헌신성과 희생성, 이런 정신에 대하여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백두의 혁명정신」이라는 말로 통칭하고 있다.

수배 혹은 수십배의 적앞에서도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심과 백절불굴의 투지, 자기 희생성을 가지고 싸웠기때문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적들과 맞서도 패한 적이 없었다.

우리 항일유격대원들이 지닌 필승의 신념과 백절불굴의 투지가 얼마나 굳센 것이었는가를 실증해 주는 실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두수는 바위굴속의 병원에서 송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이계순, 박순일을 비롯한 서너명의 병상자들과 함께 간고한 나날을 보내었다. 말이 병원이었을따름이지 변변한 약도 주사도 없었고 수술칼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 허술한 병원에도「백두의 혁명정신」만은 넘쳐 있었다.

중환자인 박순일은 2사의 군수부장이었는데 치료를 제때에 받지 못한 탓으로 발이 썩어들기 시작하였다.

보천보전투가 있은 직후 나는 병원동무들에게 식량과 함께 전투에서 노획한 의약품들과 통조림, 여름군복, 신발 등 여러가지 물건들을 보내주면서 병마와 싸워 반드시 이겨달라는 것과 완치된 다음 전장에서 만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까지 써보낸 적이 있었다.

그 편지를 받은 자리에서 박순일은 통조림통으로 자작 만든 양철톱을 내놓으면서 썩어들어가는 발을 제 손으로 잘라버리겠다고 말하였다.

송의사를 비롯한 모든 동무들이 그의 결심을 말리면서 다른 방도를 찾아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박순일자신은 그 결심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을 뿐아니라 자기를 동정하는 동료들을 소극적이라고 나무라기까지 하면서 나는 이미 발을 내 손으로 잘라낼 각오를 한 사람이다, 나의 결심을 실천하는데는 동무들의 약간한 방조가 필요할 뿐이다, 내 발을 잡아만 달라, 나는 빨리 완쾌되어 혁명초소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휘친거리는 양철톱으로 옹근 엿새동안이나 혁명가요를 부르면서 썩는 발을 자기스스로 잘라냈는데 수술을 다하고서야 쓰러졌다고 한다. 다행히 상처자리는 용케 아물어갔다.

그해 초겨울에 병원동무들은 더 깊은 산중으로 옮겨가 초막을 짓고 거기서 지냈다. 그런데 초막병원이 그만 적「토벌대」의 수색에 걸려들었다.

제일 선참으로 적을 발견한 박순일은 동지들을 구원할 일념으로 자기를 생포하려고 달려드는 적병을 붙안고 벼랑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토벌대가 왔다.』고 고함을 질렀다.

혁명을 위하여서는 스스로 자기 발을 자르면서까지 생명을 귀중히 보존하였지만 동지들을 위하여서는 자기 생명도 서슴없이 바친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백두산에서 살며 싸웠다.

박순일이 알려준 덕분에 나무를 베려고 병원초막을 떠났던 이두수는 쉽사리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계순을 포함한 몇사람은 붙잡혀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희생되었다.

동지들도 초막도 양식도 없이 산중에 홀로 남은 이두수는 혹심한 참경을 당하게 되었다. 옹근 엿새동안이나 그는 낟알 한알 구경 못하고 꼬박 굶었다. 그러다가 이계순이 끼니를 마련할 때마다 몇알씩 절약하여 남겨둔 둬사발 되는 콩을 발견하였다. 콩이 다 거덜난 다음에는 메돼지가 뜯어먹곤 한다는 속새풀을 씹으며 목숨을 이어갔다. 그 무서운 백두산 추위속에서 옷마저 다 꿰져 헌 마대쪼박으로 몸을 가리우고 원시인처럼 한지에서 지내야 하였으니 그 간난신고를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까마귀떼들은 주변의 나무가지들에 매일같이 날아와 소란스럽게 울어댔다. 때로는 번갈아 한마리씩 날아내려와서 그의 얼굴을 슬쩍 다쳐보기도 하였다.

이두수자신도 죽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재속에 묻어 가까스로 살려오던 불씨마저 스러져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최후를 각오한 그 순간에 그는 완쾌되어 전장에서 만나자고 한 우리의 당부와 전우들의 안전을 위해 벼랑밑으로 굴러떨어진 박순일의 최후를 상기하였다고 한다.

『나에게는 죽을 권리가 없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은 자기를 희생시켜 나를 살려준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다. 살아서 다시 전장에 나서라는 것은 사령관동지가 내게 준 명령이다. 나는 그 명령을 어길 권리가 없다.』

이두수는 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하였다. 그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절해고도와 같은 산중에서 무려 석달 스무날동안이나 홀로 지내면서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보존하였다.

이두수와 마찬가지로 박순일과 이계순 그리고 희생된 모든 전우들도 역시 몸은 한점의 티끌로 사라지면서도 정신만은 백두의 영봉처럼 도고한 불사조들이었다.

우리는 홍두산전투가 있은 다음 연이어 도천리전투와 이명수전투를 치르었다.

홍두산전투후 나는 곧 부대주력을 이끌고 장백현 하강구쪽으로 내려갔다. 적들이 백두산 주변일대에 다시금 대병력을 집중하여 대대적인 수색전을 펴고 있는 조건에서 새로운 군사작전을 벌이려면 적들의 주의를 다른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우리 주력부대가 하강구 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적 「토벌」역량을 분산시켜놓고 혼란을 조성한 다음 적의 「동기토벌」을 결정적으로 분쇄하려는 전술적 이동이었다. 원래 우리는 음력설만 지나면 남만동무들과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부대가 요방자근방마을에 이르자 나는 숙영명령을 내리고 도천리에 정찰조를 파견하였다. 정찰조원들은 마을로 내려가던 도중 마침 적정통보를 가지고 우리의 소부대를 찾아오던 도천리지하조직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가져온 통보에 의하면 우리의 대소부대배합전술에 걸려들어 겨우내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허탕을 친 정안군부대가 우리와 결판을 내겠다며 사령부를 찾아 헤매고있다는 것이었다.

요방자에서 도천리나 최영감골로 가려면 봇나무, 자작나무, 가시나무와 키가 넘는 갈대들, 새초풀들이 얼기설기 뒤엉킨 무연한 소로길을 지나야 하였다. 우리는 이 길로 도천리 상촌에 갔는데 그때 전령병 최금산이 떨기나무숲에 들어섰다가 가시에 눈을 찔려 소동이 벌어졌다.

만약 이 30리길에 적들을 끌어들인다면 적들은 외줄로 행군하게 될 것이므로 우리 기본부대가 진대통이 가로놓인 요소요소에 매복했다가 쉽게 놈들을 토막쳐 족칠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우선 소부대유인전으로 적들이 잔뜩 피로를 느끼게 만들어놓은 다음 대부대매복전으로 모조리 소멸할 결심을 내리고 오중흡을 사령부로 불렀다.

나는 오중흡에게 적들을 그 등판의 오솔길로 유인해 들여다 토막내어 족치라는 임무를 주었다. 유인조성원들은 적의 행군종대가 나타나자 그 선두대열에 일제히 불의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피하여 매복조들이 잠복하고 있는 가시덤불 등판으로 이동하였다. 그것을 알리 없는 적들은 무작정 그들의 뒤를 쫓았다.

우리의 유인조성원들은 가시덤불이 뒤엉킨 등판길에 들어섰다. 가시덤불은 산생활에서 단련되지 못한 적들에게 있어서 가시철조망과 같은 장애물이었다. 그 가시덤불의 성화때문에 적의 대오는 자연히 토막토막 끊어지게 되었다. 매복조성원들이 적대열의 도간도간에 불소나기를 덮씌웠다. 적들은 골짜기를 따라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면서 갈팡질팡하다가는 눈위에 피를 뿌리며 꼬꾸라졌다. 수백명에 달하는 병력이 우리의 토막치기전술에 걸려들어 녹아나고 말았다. 적들은 날이 어슬어슬해지기 시작하자 수많은 사상자들을 전장에 팽개치고 도천리부락으로 도망쳤다.

도천리지하조직에서는 적들이 그날 밤중으로 저들의 소굴로 돌아갈 것 같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적들은 우리의 야습이 두려워 몹시 서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대의 집결장소에서 도천리 앞도로까지 가려면 적어도 2시간나마 걸려야만 하였다. 우리가 그 도로계선에 가닿을 시간을 얻으려면 구실을 만들어 적의 출발시간을 지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도천리지하조직에 될수록 적들의 저녁식사준비를 질질 끌라는 지시를 주었다.

도천리지하조직에서는 우리 부대가 산에서 내려와 매복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일부러 식사준비를 질질 끌었다. 적들은 초조해서 저녁을 빨리 지어달라고 독촉하였지만 지하조직원인 구장 정동철은 무슨 큰 성의라도 베풀 듯이 정안군어른들이 모처럼 우리 마을에 왔는데 어떻게 대접을 소홀히 하겠는가고 하면서 닭도 잡게 하고 쌀도 찧게 하는 등으로 식사준비를 늦잡았다. 결국 적들은 한밤중이 거의나 되어서야 마을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우리가 도천리앞의 큰길 좌우에 매복을 끝내고 반시간 가까이 적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었다.

이 매복전에서 우리는 정안군부대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새초가 깔린 등판에 적의 주검이 한벌 널려 있었다. 유격대원들은 그 시체들에서 총만 벗겨가지고 유유히 철수하였다. 이 시체들을 실어 나르는데만 해도 24필의 소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소발구 하나에 주검 9구씩 처싣고 13도구까지 날라갔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사람들은 『소발구 하나에 아홉개씩 스물네발구면 모두 얼마요?』하면서 적들이 당한 패배를 깨고소해 하였다.

도천리전투를 치른 다음 우리 부대는 부후물골짜기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남만동무들을 만났고 그들과의 연합작전으로 또 한차례의 통쾌한 싸움을 하였다. 그것은 적들의  「동기대토벌」작전을 결정적으로 분쇄한 최종전투였다.

적들이 전력을 다하여 구상하고 감행한 「동기대토벌」의 격파와 조선인민혁명군의 연전연승으로 하여 장백땅은 완전한 우리 세상으로 되고 말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면서 혁명군의 조국진출을 막아보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하였으나 오히려 싸움을 벌이는족족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 적들은 우리를 정치적으로 몰락시키고 도덕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하여  「비적수괴」니,  「공비괴수」니 하는 험담을 해가면서 별의별짓을 다하였으나 거기에서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되자 그들자신도 우리의 유격전술을 놓고「신출귀몰」이니,  「승천입지」니 하고 아우성을 쳤으며 벌벌 떨었다.

일만군경들은 천변만화하는 우리의 전법에 걸려 꼼짝달싹하지 못하였다. 적들이 제일 무서워한 것은  「라와전법」이었다. 그들은 출판물과 내적인 훈령을 통하여 산악지대에서 「라와전」의 함정에 빠지지 말데 대하여 거듭 강조하였다. 일단 「라와 」에 걸리기만 하면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공포심리가 일만군경들속에서 열병처럼 만연되었다.

 「라와전법」이란 조선인민혁명군의 가장 대표적인 유격전법의 하나인 매복전에 대하여 일만군경들이 붙인 이름이다. 「라와」라는 것은 라망의 중국식발음인데 하늘과 땅 그 어디에도 빠질곳이 없는 천라지망 즉 포위망, 함정이라는 뜻이다.

1936년 말부터 1937년 초에 이르는 「동기대토벌」에서 패배한 적들은 그때의 「토벌」경험에 대하여 떠들면서 우리의 「라와전법」에 걸려서 혼이 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1937년 5월호의 만주경찰잡지  「철심」은 혼성여단 군사교관 이시자와가 쓴『김일성빨치산 기습전에 대하여』와 『이번 토벌에 관한 소감』그리고 그후의 좌담회 기사 『토벌체험을 이야기하다』등의 글에서 「라와전법」의 전술적 완벽성에 대하여 시인하면서 빨치산의 전법은 이번「토벌」기간을 통하여 보면 어디까지나 대체로  「라와전법」을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은 우리보다 병력이 적을 때에 이 전법을 쓸 뿐아니라 병력이 많을 때에도 이  전법을  쓰는  것을 상투적  수단으로 삼고 있다, 올해 2월 무송현성 서남방 대쟈피거우 부근에서 있은 김일성빨치산과의 조우에서 모두가 용전분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영예의 전사를 한 것은 무엇보다도 빨치산의 전술 「라와전법」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른 실례는 얼마든지 있다고 고백하면서 다시금  「라와」를 경계할데 대한 경종을 울리었다.

우리의 유격전술에 대해서는 국제당학교에서도 주의를 돌렸던 것 같다. 항일혁명투사 박광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제당학교의 일꾼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유격전법을 자주 강조한데 대하여 회상하곤 하였다.

소련에는 국제당이 운영하는 학교들이 있었는데 그 당시 만주지방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학교들을 국제당학교 또는 국제당대학이라고 불렀다. 국제당학교는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조직의 추천을 받아오는 유학생들과 공산주의 운동자들에 대한 정치군사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박광선도 여기서 얼마동안 학창생활을 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장백땅에 울린 총소리들은 총독부 수뇌들과 조선주둔 일본군경들, 일본본토의 정객들과 군벌들, 자본가들을 전율케 하였다. 침략자들과 반동들이 그 총소리를 듣고 아연해 하였다면 우리 인민들은 기뻐하였다.

우리가 장백에서 연전연승으로 수행한 대담한 군사작전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해 놓았다. 이 작전들로 하여 조선혁명의 실제적 주력으로서의 우리 혁명군의 지위는 확고한 것으로 되었다.

나는 우리가 장백에서 벌인 싸움들이 세계를 들었다놓은 규모가 큰 것들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세계전쟁사에는 수천 수만, 지어는 수십만의 사상자를 낸 요란한 전역들과 대결전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한 전투에 투하한 병력은 불과 수백명, 적살상도 백이나 천단위를 헤아릴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싸움들에 대하여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돌이켜본다.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간고한 싸움에서 발현된 혁명군의 넋이다. 인민혁명군의 의지는 적들을 압도하였다. 적을 정신적으로 압도하면 승리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우리가 장백땅에서 벌인 혈전의 자취들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