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벽은 말수더구가 적은 사람이었다. 선전일꾼이라면 의례히 말을 잘하는 것으로 통하고 있지만 그는 사단선전과장으로 사업할 때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요긴한 말을 조리있게 몇마디 할뿐 실속없는 빈말을 늘어놓거나 한번 한 말을 다시 곱씹는 법이라고는 없었다. 얼굴표정이나 외모를 보아서는 그의 생각과 감정상태를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다.

권영벽은 거짓말을 하거나 허장성세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였다. 그는 자기가 한다고 말한 것은 몸이 열쪼각이 나도 기어이 해내는 사람이었다. 언행의 일치, 아마 그것이 권영벽의 사람됨을 단마디로 규정 지을 수 있는 특징이며 인간적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백두산과 서간도를 주되는 활동지대로 삼고 싸우던 당시 권영벽에게 장백현당위원회 책임자의 중책을 맡긴 것도 기실은 그 인간적 매력을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장백현당 책임자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였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자면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장백현당은 우리가 백두산밀영에서 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열고 무슨 노선을 세우거나 긴급한 과업을 제기하면 그것을 제일 먼저 접수하고 집행하는 중추적인 당조직의 하나였다. 우리가 내놓은 노선이나 과업들은 많은 경우 장백현당과 국내당공작위원회, 동만당공작위원회를 통하여 서간도와 북간도, 국내에 전달침투되었으며 그 집행결과도 대부분은 이 통로를 거쳐 인민혁명군당위원회에 보고 되었다.

장백현당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지위와 역할은 우리가 백두산밀영에 활동거점을 잡은 조건에서 서간도땅을 또 하나의 발판으로 삼아 국내와 만주에서 혁명을 확대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정과 조선공산당이 해산된 후 새형의 당을 창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인민혁명군당위원회가 국내당공작위원회와 동만당공작위원회, 장백현당위원회 등을 통하여 당조직건설과 전반적인 항일혁명을 영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정으로부터 출발한것이다.

1930년대 전반기 우리가 동만에서 유격근거지를 꾸려놓고 싸울 때 소왕청이 항일혁명의 중심지로 되었던 것처럼 후반기에는 서간도를 포함하는 백두산근거지가 항일혁명의 중심지로 되었다. 백두산밀영은 그 중심에 있는 핵이었고 백두산주변 국내의 넓은 지역과 함께 장백땅은 그 핵을 둘러싼 살이었다. 장백땅에는 우리가 건설한 밀영들이 많았다. 그 밀영들을 보호하고 보존하자면 장백땅을 우리 세상으로 만들고 장백지방의 인민들을 혁명화해야 하였다.

장백에서 조국광복회 조직건설운동을 전개해 나가자면 적들과의 첨예한 대결이 불가피하였다. 만주국의 통치는 서툴었지만 장백에 있는 일본의 첩보세력이라든가 일만군경의「토벌」역량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국내로 진출할 때 장백땅을 반드시 경유한 것처럼 적들도 우리를 치자면 장백땅을 거쳐야 하였다. 장백은 적아쌍방이 다같이 중시하는 군사전략상 요충지였다.

이런 실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장백현당 책임자를 선발하는데서 기준을 높이 세웠다. 장백현당 책임자라는 중책을 감당하자면 큰 담력과 선동력, 포옹력, 조직력, 활동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였다. 지하전선을 움직이는 것만큼 정확한 판단력과 치밀성, 임기응변의 지략도 지니고 있어야 하였다. 특히는 시야가 넓어야 하였다.

이런 표징을 갖춘 인물을 고를 때 내 머리에 선참으로 떠오른 사람이 다름 아닌 권영벽이었다. 김평도 그를 추천하였다.

나와 권영벽은 동창도 아니었고 동향인도 아니었으며 유격구시절부터 한가마밥을 먹으며 고락을 같이한 사이도 아니었다. 1930년대 전반기 유격구가 한창 번성하던 시절에 나는 왕청에 있었고 권영벽은 연길에 있었다. 권영벽은 교하원정에 참가하였다가 1936년 10월에야 백두산밀영으로 찾아와 주력부대에 편입되었다.

권영벽은 일찍이 중학시절부터 반일운동에 참가하였다. 「불온학생」으로 지목되어 퇴학처분을 당한 다음부터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직업적인 혁명가가 되었다. 나는 동만지구에 있을 때 오중화인가 박영순한테서 권영벽에 대한 일화를 들은 일이 있었다. 그 일화란 아버지의 장례날 그가 당한 참극과 그때에 나타낸 그의 비상한 자제력에 대한 것이었다.

어느날 공작지에서 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부고를 받은 권영벽은 저녁 어스름을 타서 집으로 달려갔다. 그가 상복을 입고 아버지의 영구앞에 서기도전에 어느새 낌새를 챘는지 말탄 헌병들이 장례현장에 달려들어 식구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권영벽에게 네놈이 권창욱이냐고 물었다. 창욱이란 그의 아명이었다. 권영벽은 헌병들중에 자기 얼굴을 아는 놈이 한명도 없다는 것을 인차 간파하고는 공손하게 동생 창욱이는 오래 전에 집을 떠난 후 어데 가있는지 몰라서 부고조차 보내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그 시각에 형 권상욱은 마침 도가에 가고 없었다. 그통에 권영벽은 권상욱의 역을 한 것이다.

적들은 권영벽을 잡지 못한 분풀이로 영구가 놓여있는 집에 불을 지르고 집이 다 타서 재가되는 것까지 보고서야 물러가버리었다.

권영벽은 아버지의 시신이 처참하게 불타는 광경을 보면서도 입술을 앙다물고 비분을 삼키며 참고견디었다. 공작지로 돌아간 그는 동지들이 부어주는 술도 마시지 못하였다. 자기의 이발에 깨물리운 혀와 입술의 상처가 너무 심해서 며칠동안 죽도 먹지 못하였다.

권영벽은 동만의 공산주의자들속에서 비상한 자제력을 가진 청년투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혁명가가 원수들을 타승하고 대의를 성취하려거든 권영벽쯤 되는 참을성을 가지고 일시적인 충동이나 고통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례날의 그 일화를 들은 사람들이 다 권영벽을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가 두벌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권영벽이 대항해 나서지 않은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자식으로서 어찌 처신을 그렇게 한단 말인가, 무슨 수를 써서든지 놈들이 영구를 태워버리지 못하게 막아 나서야 할게 아닌가고 비난하였다.

그런 비난을 두고 권영벽의 지지자들은 모르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리었다. 보통사람이 그런 순간에 놈들에게 대항해 나선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권영벽은 적들앞에 자기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적들에게 항거해 나서면 즉석에서 총살당할 것이고 잘되는 경우라야 감옥에 잡혀가겠는데 그러면 혁명도 못하고 말 것이 아닌가고 하였다.

권영벽은 혁명의 길에 나설 때 집을 떠나면서 안해에게 이런 작별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요. 설사 살아서 돌아온다 하더라도 혁명이 10년후에 성공하게 될지, 20년후에 성공하게 될지 그것도 기약할 수가 없소. 그러니 당신은 나를 기다리느라 하지 말고 당신나름대로 살길을 찾소. 당신이 나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치고 재혼한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탓하지 않겠소. 다만 부탁할 것은 아이가 자라서 철이 들면 아버지의 뒤를 잇도록 잘 키워 달라는 것이요.』

이 작별인사 역시 시비거리가 되었다. 안해에게 하는 작별인사치고는 너무도 몰인정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여성일반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였다. 같은 값이면 왜 나는 이기고 돌아온다,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안해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조선여자들에게는 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혁명의 길에 나선 남편들을 기다릴만한 절개와 의리도 없단 말인가, 여자들을 얕보아도 분수가 있지 않느냐고 하였다.

권영벽이 안해에게 했다는 말을 직선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그보다 더 혹독한 비난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혁명의 길에 한몸을 서슴없이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며 안해를 참답게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일단 혁명을 시작하면 끝장을 볼 때까지 온몸과 넋을 깡그리 연소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투사가 아니고서는 그처럼 솔직하고 비장한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권영벽의 그 말에서 오히려 참다운 인간상을 발견하였다.

여러해가 지난 1935년 봄에 나는 요영구에서 권영벽을 처음으로 만나보았다. 당시 거기서는 동만각지의 유격부대들과 혁명조직들에서 활동하는 일꾼들을 선발하여 군사정치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단기군정강습을 주었는데 그 수강생들가운데 권영벽도 끼어있었다.

광란적인 반「민생단」투쟁소동으로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이국의 고혼으로 사라진 그때 강습장에서 그를 대하게 되니 마치 다정한 옛 벗을 보는 것만 같아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우리는 서로 통성도 하고 담화도 하였다. 첫 상면치고는 꽤 진지한 담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가운데는 안해와 헤어지던 때의 장면도 있었다.

『안해에게 좀더 살뜰한 말을 남기고 떠날걸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의 가슴이 덜 아팠을게 아닙니까.』

내가 이런 말로 아쉬움을 표시하자 권영벽은 머리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아무때건 당할 아픔인데 뒤로 미룰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동무는 지금도 살아서 안해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권영벽은 그 물음에도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살아서 조국이 광복되는 것도 보고 고향에도 돌아가고 싶지만 그런 행운이 나한테는 차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적들과의 결전에서 뒷자리에 설 생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맨 앞자리를 차지할 작정입니다. 선두에서 결사전을 벌여야 할 이 몸이 어찌 살아날 생각부터 하겠습니까. 그런 우연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가 한 말에는 진실이 담겨져 있었다.

권영벽의 그후 행적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는 실지로 혈전장에서나 지하전선에서나 가장 치열하고 위험한 앞자리에 서군하였다. 2연대가 교하원정을 할 때 권영벽은 2중대 당지부서기로 있었다. 원정대가 적들의 포위속에 들어 괴멸당할번한 위기를 여러 번 겪었으나 그때마다 그는 오중흡을 비롯한 전우들과 함께 연대를 구출해내군 하였다.

개미 한마리도 얼씬하지 못한다는 국경경계망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가서 박달에게 나의 사신을 맨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도 권영벽이었다.

우리가 권영벽을 장백현당 책임자후보로 내정하게 된 다른 하나의 이유는 그가 1930년대 전반기 간도에서 사업할 때 일정한 지하공작경험을 쌓은 사람이라는데 있었다.

권영벽의 가장 큰 우점은 사람과의 사업을 아주 능숙하게 할 줄 안다는데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잘 끌어당기었을 뿐 아니라 끌어당긴 사람들을 원만하게 통솔할 줄 아는 일꾼이었다.

황남순(황정렬)은 지금도 그가 옹성라자에 가서 그 마을 좌상노인과의 사업을 능숙하게 하던 일을 감명깊게 회상하고 있다. 그 좌상노인의 성미가 이만저만 드세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공작원들이 여러 번 옹성라자를 개척하려고 침투해보았으나 그 노인때문에 발도 붙이지 못하고 다 쫓겨났다고 한다. 원인은 공작원들이 마을사람들과 인간적으로 친숙해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사상부터 주입하려 한데 있었다. 특히 그들은 좌상노인과의 사업을 잘하지 못하였다. 그 노인을 봉건이라고 하면서 무작정 따돌리기만 하고 쟁취할 궁리는 하지 않았다. 옹성라자의 그 좌상노인이 분명 오가자의 「변뜨로쯔끼」영감만치나 대가 세고 완고하였던 것 같다.

권영벽은 자기 식대로 그 좌상과의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우선 노인이 예의범절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과는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가지고 격식을 차려 초면인사부터 깍듯이 하였다. 노인앞에 나타나자마자 조선예법대로 방바닥에 엎드려서 『노인님, 저는 생활이 넉넉치 못해서 떠돌아다니며 품팔이를 하는 사람이올시다. 이 마을 인심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잘 보살펴주고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정중하게 절을 하였다.

권영벽의 남다른 예절과 인품에 기분이 흐뭇해진 좌상노인은 『그 젊은이 과연 인사범절이 밝다. 뉘집 후손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절지키는 걸 보니 속이 익었거든. 우리 마을 인심이 무던한데 여기서 마음을 맞추며 살아 가세나.』라고 하면서 점심까지 대접하였다. 옹성라자에서는 이 노인을 쟁취하는 것이 전투장에서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는 것만치나 힘든 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권영벽은 조선절 한번으로 그 고지를 어렵지 않게 점령하였다. 이렇게 되어 마을혁명화도 쉽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권영벽을 장백현당 책임자로 내정한 다음 그로 하여금 현을 한바퀴 돌아보게 하였다. 현실연구를 시키자는 것이었다.

권영벽은 한달가량 현지답사를 하고 나서 밀영에 돌아왔다.

1937년 2월 우리는 권영벽을 비롯한 여러 명의 지하공작원들과 함께 횡산밀영에서 모임을 가지고 장백현당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권영벽은 현당책임자의 직무를 정식으로 맡게 되었다. 현당 부책임자로는 이제순이 추천되었다. 회의에서는 또한 산하의 구당과 당소조들을 확대할 데 대하여 결정하였다.

나는 이날 권영벽에게 사업범위를 넓혀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 조직건설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할 데 대하여 강조하고 참군희망자들을 혁명군에 추천해 보내는 문제, 적기관복무자들을 쟁취하여 조직에 받아들이는 문제, 조직성원들의 힘으로 군사정찰을 진행하는 문제 등 장백현당앞에 나선 여러가지 과업을 제기하였다.

그후 나는 인차 그를 적구에 파견하였다. 권영벽이 적구로 내려갈 때 우리는 그에게 황남순을 방조자로 붙여주었다. 권영벽과 황남순은 공작상 필요에 따라 부부로 위장하였다. 이것은 신변안전을 위해서도 매우 적절한 위장방법이었다.

황남순은 일찍부터 지하공작경험을 쌓은 여자였다. 그는 15살 때 석인구 지장골이라는 마을에서 지하공작을 한적이 있었다.

어느날 황남순은 지장골의 한 농가에 가서 주인들의 일손을 도와주다가 그 집 부엌에 걸려있는 가마를 보고 깜짝 놀랐다. 부암촌유격구에서 살 때 자기 집에서 쓰던 바로 그 가마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어 유격구에 있던 가마가 이 집 부엌에 와 걸려 있을가. 혹시 이 집 주인이 「토벌대」를 따라갔다가 놈들한테서 받아온 것이 아닐가.)

황남순은 며칠동안 이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지장골의 지하조직원들은 그 사연을 알게 되자 개가 틀림없으니 그 집을 아예 마을에서 들어내자고 하였다. 하지만 황남순은 인내성있게 주인집사람들을 알아보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그 가마가 「토벌대」가 부암촌유격구에 쳐들어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가재도구들을 소각해버릴 때 적들이 뽑아 내던진 가마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달구지와 함께 「토벌대」에 강제로 끌리어 부암촌까지 따라갔던 집주인이 불탄 집터옆에서 나딩구는 황남순네 집 가마를 처 싣고 돌아왔던 것이다. 적의 주구라는 낙인을 받고 추방당할번했던 그 집 사람들은 인차 반일회와 부녀회 성원이 되었다.

그런데 황남순과 지장골에 나갔던 임수산은 지하공작에서 실패하였다. 이론도 있고 풍채도 좋은 신수멀끔한 사람이었지만 군중들과 어울릴 줄 모르다 보니 호감을 사지 못하고 식객취급을 당하였다. 그는 어떤 반일회원네 집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 하루 세끼씩 차려주는 밥이나 축내면서 집주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지시만 하였다. 어쩌다가 외출이라고 문밖을 나서는 경우에도 뒤짐을 지고 마을사람들에게 그 무엇인가를 검토하는 듯한 질문을 연거퍼 들이댐으로써 상대방은 물론이거니와 곁에서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불쾌한 감을 느끼게 하였다. 임수산은 지장골사람들속에 종시 발을 붙이지 못하고 유격구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기를 인민의 머리위에 군림한 특수한 존재로 여기게 되면 결국 군중의 버림을 받는 가련한 존재가 되고만다. 물우에 뜬 기름방울처럼 사람들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겉에서만 맴돌면 군중의 호감을 살수도 없고 그들을 쟁취할 수도 없다.

권영벽과 황남순을 장백으로 파견할 때 우리 밀영에는 장백현에서 활동하는 지하공작원들이 많이 와있었다. 권영벽은 그날 그들과 함께 나한테서 적구공작임무를 받았다. 그가 임무를 흔연히 받아들이었으나 나는 마음이 가볍지 못하였다. 그에게 너무도 아름찬 과업을 짊어지운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서였다. 장백지구는 7도구로부터 25도구까지를 포괄하고 있어 사실 합법적인 당사업을 한다 해도 헐치 않은 넓은 지역이었다. 게다가 그는 장백현당사업을 지도하면서 국내운동에도 깊이 관여해야 하였다.

장백으로 파견되는 지하공작원들과 헤어질 때의 인상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지양개의 농민들이 음력설을 쇠라고 보내준 감자엿을 깨어먹던 일이다. 식량사정이 곤난한 때여서 진수성찬은 차려주지 못하고 엿을 한쪼각씩 나누어 먹었는데 왜 그런지 그것이 오히려 깊은 감회를 자아낸다.

…나는 동무에게 장백을 맡긴다. 장백과 나아가서는 서간도를 다 장악해야 우리는 인민의 지원도 받을 수 있고 혁명군의 인적후비도 마련할 수 있다. 서간도를 틀어쥐지 못하면 우리가 대부대로 압록강을 넘나들며 국내작전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이해 봄이나 여름부터 조국진출을 단행하려고 한다. 동무는 이제부터 적구에서 인민들과의 사업을 잘 해야 한다. 동무의 임무는 당조직건설을 하면서 인민들을 조국광복회조직에 묶어 세우는 것이다. 인민들을 전취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 결과는 동무에게 달려있다. 나는 동무를 믿는다.…

이것은 권영벽을 바래주면서 내가 한 말이다.

권영벽이네가 공작지로 떠나는 날 오전 우리는 한차례의 전투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출발은 아주 부산스럽게 되었다.

권영벽은 17도구 따스포네 집과 20도구 이제순의 집을 거쳐 공작거점으로 사령부가 이미 내정해준 17도구 토기점리에 무사히 침투해 들어갔다. 왕가성을 가진 중국인지주가 세도를 부리던 곳이라고 하여 일명 왕가골이라고도 부르는 17도구는 장백현의 중심부에 놓여 있는 고장이었다. 게다가 압록강만 건느면 호인, 혜산 등지를 거쳐 국내깊이에도 가 닿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왕가동은 왕가골에 있는 한개 부락이었다.

권영벽은 길회선철도부설공사장에서 일공노동을 하다가 일자리를 떼운 서응진의 외조카로 가장하고 토기점리에 자리를 잡았다. 서응진은 연길지방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반일조직에 망라되어 혁명사업을 해오다가 정체가 드러나는 바람에 서간도로 이주해온 노숙한 지하공작원이었다. 서응진, 최경화를 비롯한 17도구의 혁명조직성원들은 권영벽이 적들의 의심을 받지 않고 왕가동에 무난히 발을 붙일 수 있도록 집도 마련해주고 뙈기밭도 떼주었으며 왕가동을 관할하는 경찰서장에게 뇌물로 아편을 찔러주고 거주승인까지 받았다.

그때부터 권영벽은 권수남으로, 황남순은 황정렬로 각각 변성명을 하고 조직원들이 마련해준 작은 집에서 가짜부부생활을 시작하였다. 훗날 권영벽은 황남순을 부를 때마다「동무」라는 호칭이 튀어나와서 당황해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실토하였다.

원군물자공작조를 데리고 17도구를 다녀온 김주현은 왕가동주민들속에서 벌써 새 「부부」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라고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이 고장에 발을 붙인 첫날부터 진일, 마른일을 가리지 않고 동리사람들의 일손을 직심스럽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권영벽은 공작상 필요로 이집저집 돌아다니다가도 남자의 손이 가닿아야 할 일거리가 눈에 띄우면 나무도 패주고 작두질도 해주고 마당도 쓸어주었다. 관혼상제를 하는 집에 가서는 떡도 쳐주고 돼지도 잡아주었다. 그가 돼지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을 꺼내는 솜씨를 본 사람들은 권영벽을 가리켜 한결같이 백정찜쪄먹을 사람이라고 하였다. 왕가동사람들은 소나 돼지를 잡을 일이 생기면 권영벽부터 찾군 하였다고 한다.

두 공작원은 일솜씨와 일본새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놓았다. 그들은 남들이 자기네를 도와주는 것은 한사코 사양하면서도 자기네가 남들을 돕는 것은 응당한 일로 여기였다. 권영벽은 지하공작원이 남들에게 부담을 끼치는 존재로 된다면 그 공작은 벌써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제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실농군처럼 자기 집 일도 직심스럽게 하였다.

권영벽이네가 왕가동에 갓 자리를 잡았을 때 그곳 조국광복회원들은 지하사업으로 분망한 그들의 일손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어 땔나무를 해다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권영벽은 그 선의를 한사코 막았다.

『여러분, 고마운 일이지만 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평농사꾼한테 땔나무까지 해다 주면 적들이 인차 우리를 수상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도와주고 싶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나를 도와주는 길입니다.』

지하조직성원들은 다른 수를 생각해냈다. 그들은 땔나무를 하면 권영벽이네 집에 직접 져다 주지 않고 그가 다루는 보리밭머리에 몰래 가져다 놓군하였다. 그런데 권영벽은 조직원들의 이 성의마저도 마다하였다. 그는 땔나무도 손수 해오고 거름도 직접 져냈다.

권영벽은 왕가동에서 사업하는 동안 일찍이 잠자리에 들어본 적이 없었고 늦게까지 누워있어 본적이 없었다. 그는 다른 공작지에 가서도 하루 3~4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고 한다.

권영벽은 허줄한 봇짐을 메고 줄곧 어디론가 나돌아다니었는데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은 부부사이에 금슬이 좋지 못해서 아마 자주 외박을 하는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하강구의 7도구로부터 상강구의 25도구에 이르는 수백리의 노정을 권영벽은 한달에도 몇차례씩 발이 닳게 돌아다니었다. 장백현에 부락들이 많았지만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부락이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남들처럼 잠인들 제대로 잘 수 있었겠는가.

언제인가 밀영에 사업보고를 하려고 들어온 권영벽을 보니 두눈이 뻘겋게 충혈되어있었다. 몸을 돌보면서 일을 해야지 한두해만 혁명을 하다 말겠는가고 가볍게 나무라는 말을 했더니 그는 조직을 내오는 재미가 어찌나 아기자기한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권영벽과 그 전우들의 정력적인 활동에 의하여 1937년 초봄까지는 장백현의 거의 모든 중심부락들에 지하당조직들이 나왔다. 권영벽의 산하에는 수많은 당소조들과 조국광복회 지회, 분회 조직들이 태어나 역량이 급속히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생산유격대들도 당조직들의 보호와 지도밑에 맹열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밤에 장백땅을 활보하며 민심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만주국의 관리가 아니라 권영벽의 손탁안에 들어있는 우리 사람들이었다.

권영벽은 이전보다 더 분망한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직접 교양하고 육성한 믿음직한 공작원들이 여러 명 국내에로 들어갔다. 17도구의 지하혁명조직들은 지하공작의 담당자들을 양성해내는 원종장이나 다름없었다.

권영벽은 반군사조직인 생산유격대를 통해서도 청년들을 교양하고 단련시키었다. 생산유격대에 망라된 청장년들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지하혁명조직을 보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유사시에 무장투쟁에 나설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

권영벽은 조직원들인 촌장들과 상론하여 자위단의 야간순찰대를 생산유격대원들로 꾸리게 하였다. 생산유격대원들은 야간순찰대라는 합법적인 명목으로 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하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순찰을 하였다.

많은 생산유격대원들이 권영벽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투사로 자라났다. 최경화도 그의 지도밑에서 왕가동지회 청년부책임자 및 특수회원책임자, 왕가동당지부 조직담당 책임자로 성장하였다. 그의 맏아들도 아동단조직에서 투사로 자라났다.

권영벽은 오래 전부터 참군을 열망해온 최경화의 의사를 존중하여 그를 우리에게 추천하여 보냈다.

사생활에서는 언제나 결백하고 양심적이고 고지식한 권영벽이였지만 지하전선의 중임을 맡은 다음부터는 순간순간마다 능란한 위장책을 써가면서 적들을 감쪽같이 속여넘기고 자기자신과 동지들과 조직들을 철저히 보호하였다. 조직의 핵심성원들을 적기관의 요직에 박아 넣은 것도 일종의 위장책이었다.

권영벽은 지하당조직이나 조국광복회 조직에 망라된 촌장들이 적들의 신임속에서 안전하게 원군사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조선인민혁명군 군수관의 명의로 된 편지를 나누어주어 경찰서에 가져다 바치게 하였다. 편지에는 아무 날까지 어떠어떠한 원군물자를 마련해놓으라는 요구와 함께 이 사실을 경찰서에 고발하는 경우에는 촌장의 신변이 무사치 못할 것이라는 위협적인 경고가 첨부되어 있었다.

경찰서에서는 경고편지를 들고 오는 촌장들을 충직하다고 치하하였다. 그런데 유독 왕가동촌장만은 권영벽이 짜준 각본대로 편지를 바치지 않았다. 이 유다른 행동이 적들의 주의를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날 반절구경찰서 서장은 촌장을 불러다 놓고 노발대발해서 당신은 「공비」와 내통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 증거를 쥐고 있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라고 을러메었다.

왕가동촌장은 태연스럽게 증거가 있으면 내놓으라, 나는 혁명군의 「빨간콩알」 에 맞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리님들을 위해 촌장노릇을 하고 있는데 「통비분자」라는 감투를 씌우니 매우 섭섭하다고 하였다.

서장은 당신은 정직하지 못하다, 정직한 촌장이라면 응당 이런 것을 가져다 바쳤을 것이 아닌가, 다른 촌장들은 다 바쳤는데 당신만은 왜 시치미를 떼고 있는가고 하면서 서랍을 열고 혁명군군수관의 편지를 꺼내놓았다.

왕가동촌장은 그제서야 괴춤에서 편지를 꺼내놓았다. 그리고는 나도 물론 경고문을 받았다, 혁명군이 나한테라고 왜 물자를 요구하지 않겠는가, 자, 이것이 그 경고문이다, 그렇지만 난 나리님들을 생각해서 우정 바치지 않았다, 나리님들이 이 편지를 보면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텐데 대책이 있는가, 한다하는 「토벌대」들도 몇백명씩 무리를 지어 갔다가 혁명군한테 얻어맞고 쫓겨왔는데 이런 자그마한 경찰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이런 편지를 가져다 바친대야 오히려 나리님들을 딱하게나 만들지 않는가, 혁명군하고는 적당히 지내는게 상수다, 우리가 좋도록 처리할 터이니 서장님은 모르는 척하고 있어 달라고 하였다.

그의 말은 경찰서장을 감동시키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서장은 그를 각별히 신임하게 되었다. 권영벽의 각본이 단발명중을 한 셈이다. 지하공작과정에 나 자신도 체험한 바이지만 적구에서 자기자신과 동지들과 조직을 위장하고 보호하는 것은 최대한의 지혜와 창발성을 요구하는 어려운 투쟁이다.

권영벽은 이 중하를 믿음직하게 감당해냈다.

우리는 1937년 봄에 국내진공작전을 앞두고 군민의 협동으로 보천보시가지에 대한 여러 갈래의 정찰을 조직하였다. 보천보를 정찰할 데 대한 과업은 장백현당조직에도 떨어졌다.

국내진공작전의 중대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있던 권영벽은 그 정찰임무를 자기가 직접 수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무슨 구실을 만들어가지고 집을 떠나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정찰을 하자면 여러 날 동안 외지에 가있어야 하는데 타당한 이유가 없이 길을 떠나게 되면 적들의 의심을 받을 수 있었고 심한 경우에는 미행도 당할 수 있었다. 농사꾼이 농번기에 여러 날 집을 비우고 나들이를 간다는 것은 정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권영벽은 이번에도 누구나 다 믿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한 조직원을 장백시내에 있는 우정국에 보내어 거기서 아버지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를 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 조직원이 장백에 가서 친 사망전보는 그 날로 우편배달부의 손을 거쳐 권영벽에게 전달되었다. 배달부가 왕가동에 오면서 소문을 내는 바람에 그의 「불행」을 마을사람들도 알게 되고 적들도 알게 되었다.

노인들은 부조를 들고 권영벽을 찾아와 부친상을 당했다는데 왜 안떠나고 있는가고 하면서 걱정하였다. 권영벽이 남의 땅을 부치는 농사꾼이 바쁜 농사철에 하루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 밭을 비우자니 걱정이 되어 그런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세상에 부친상보다 더 중한 일이 어디 있는가, 밭일은 우리한테 맡기고 어서 떠나라고 하였다. 그는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왕가동을 떠나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나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권영벽의 간절한 청원을 마다할 수 없어 우리는 그를 보천보전투에도 참가시키었다.

권영벽이 전투를 마치고 17도구에 돌아왔을 때 조직성원들은 그가 「상제」 구실을 원만히 할 수 있는 준비를 다 갖추어놓고 있었다. 그는 부친상을 치르고 돌아온 자식답게 상복차림으로 동네의 조객들을 맞아 들이었다. 자신을 위장하느라고 선량하고 순박한 늙은이들까지 속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때의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권영벽은 사령부가 작성한 기본노선에 근거하여 상급에 보고할 것은 보고하여 처리하고 자체로 결심할 수 있는 것은 제때에 결심을 채택하여 처리하면서 용의주도하고 능숙하게 지하공작을 해 나갔다. 전화기나 무전기와 같은 현대적인 통신수단도 없이 쪽지편지와 같은 불편한 수단을 이용하면서 사령부와의 연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실정에서 공작원들은 상급에 보고하여 처리하는 것보다 현지에서 자체의 판단과 결심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권영벽은 우리의 결론이 필요한 중요한 노선상 문제만 사령부에 보고 하였지 대부분의 문제는 현장에서 조직성원들과의 협의를 거쳐 즉결처리한 다음 그 경위와 결과만 우리에게 보고 하였다. 공작지와 밀영과의 거리가 멀고 또 우리가 노상 밀영에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만사를 다 사령부에 보고하고 결론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권영벽은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령부에 부담이 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며 부담이 된다고 인정되는 문제는 상정시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단 한번 집단부락건설과 관련된 차후 대책문제에 대해서만은 나에게 결론을 바란다고 하였다. 적들은 동만에서 하던 본새대로 서간도에서도 「비민분리」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부락건설을 강제적으로 추진시키었다. 그런데 장백지방인민들의 대다수는 집단부락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였다. 권영벽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농민들이 집단부락에 들어가면 생활상 고통도 심해질 수 있었고 지하사업이나 원군운동도 막대한 지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집단부락건설을 덮어놓고 반대할 수도 없었다. 적들은 집단부락에 들어가지 않는 집들에 불을 지르면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철거를 단행하였다. 반항하면 총을 쏘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명안이겠는가? 현당위원회를 소집하고 논의도 해보았으나 종시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권영벽에게 집단부락건설을 반대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니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모두 거기에 들어가라고 권고하였다. 집단부락에 들어가면 우리의 활동이 상당한 제약을 받을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철조망으로 강물을 막을 수 없고 성벽으로 바람을 다 막을 수 없듯이 우리 유격대와 인민들사이에 강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통하는 군민의 정과 원군의 대하는 절대로 막아내지 못한다, 걱정말고 집단부락에 들어가라고 하였다.

권영벽은 공작지에 돌아가자 관도거리 집단부락건설장에 앞장서 나갔다. 그가 나서는 것을 보고 완고파들도 따라 나서서 열성스럽게 집을 짓고 토성을 쌓았다. 권영벽의 지령에 따라 지하조직성원들은 적들의 시책을 고분고분 받아서 충실하게 집행하는 척하였다. 관도거리 집단부락은 현경찰당국으로부터 첫번째로 「안민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7도구의 지하조직성원들은 관도거리 집단부락의 요직들을 다 차지하였다. 서응진은 자위단 단장, 송태순은 자위단 부단장, 전남순은 촌장, 권영벽은 학교교장의 자리를 각각 차지하였다. 다른 집단부락들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였다.

권영벽의 지하전선은 장백의 영역을 벗어나 함남북도와 평북도를 포함한 국내의 종심깊이에도 뻗어있었다. 권영벽은 군사활동을 통해서도 많은 공로를 세웠지만 인민대중을 의식화하는 지하전선의 긴장된 투쟁을 통해서도 무게있는 공적을 쌓아올리었다.

1937년 여름 그가 통신원을 통해 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들이 적혀있었다.

『사령관동지, 솔직히 말씀드려서 나는 부대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습니다. 1선에서 2선으로 밀려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때의 그 섭섭하던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인민을 조국광복회 조직에 묶어 세우는 것이 항일혁명의 승리를 앞당기는 지름길로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건만 나는 작별의 악수를 청하는 사령관동지의 곁에서 발을 가볍게 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고장에 와서 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지하전선을 2선이라고 보던 관점에서 멀리 벗어났습니다. 이 전선은 분명 2선이 아니라 1선입니다. 조직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사람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이 비옥한 토양의 주인으로 나를 세워준 사령관동지에게 감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인민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데서 사는 보람을 느낀다고 한 권영벽의 말에는 심오한 진리가 깃들어있었다. 인민을 조직동원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한시도 놓쳐서는 안되는 항구적인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민을 부단히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여기에 바로 우리 혁명의 생명이 있고 승리가 있고 영구불멸성이 있다.

혁명가가 만일 이 사업을 외면하거나 경시한다면 그의 정치적 생리에는 변질현상이 생기게 되며 그는 혁명가로서의 존재를 끝마치게 된다.

권영벽은 이런 원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민을 조직동원하는 사업에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영용하게 싸우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그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자기자신과 동지들이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자래운 조직들이 무더기로 파괴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할수 있는 최선의 일은 다문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살려내어 조직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권영벽은 일신이 그대로 방패가 되어 혁명조직들이 당하고 있는 출혈을 최대한으로 막아보려고 애썼다. 그는 우선 이제순에게 이런 백글쪽지를 보냈다. 백글이란 펜이나 연필이 아니라 손톱으로 쓴 글을 말한다.

『모든 것을 나에게 밀 것!』

권영벽의 의도와 결심을 알아차린 이제순은 지체없이 회답쪽지를 보냈다.

『우리는 일심동체!』

그 전보문 같은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권영벽은 잘 알고 있었다.

권영벽과 이제순은 서로 딴 방에 갇혀있었고 그이상 더 쪽지도 교환하지 못하였지만 두 전우의 심장은 한마음한뜻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그들은 실로 일심동체가 되어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결사적인 구출작전에 나섰다.

『도정님이 백두산에 갔던 일과 그후의 모든 일은 나와 도정님과 장군님밖에 모르는 일이니 도정님만 입을 다무시면 아무런 죄도 씌울 것이 없게 됩니다.』

이것은 권영벽이 혜산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을 때 박인진도정에게 귀띔한 말이다.

권영벽이 그런 귀띔을 하고 있을 때 이제순은 이주익에게 같은 당부를 하였다.

권영벽과 이제순의 희생적인 구출작전의 덕으로 박인진, 이주익을 비롯한 수많은 피검자들이 재판정으로 끌려 가기 전에 유치장에서 풀려 났거나 예상보다 퍼그나 가벼운 형을 마치고 살아서 조국광복의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변절자들이 미처 다 알 수 없었던 장백과 국내의 지방조직들에 대한 권영벽의 종적 연계와 지도내용은 영원한 비밀속에 묻혀있게 되었던 까닭에 그 조직들과 조직성원들은 고스란히 생존하여 은밀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권영벽은 조직을 살리고 동지들을 살리는 대신 이제순, 이동걸, 지태환, 마동희 등의 투사들과 함께 결연히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혜산경찰서에서 함흥으로 이송되는 열차안에서도 동지들에 대한 배려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 그의 수중에는 돈이 7원 있었다. 권영벽은 그 최후의 7원마저도 동지들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하고 호송경찰에게 말했다.

『경관나리, 이 돈으로 과일과 과자를 사다 주시오. 당신들이 우리에게 수갑을 채웠으니 일본당국을 대표하여 싫은대로 심부름을 들어 주어야 겠소.』

다른 동지들도 주머니를 뒤져 30여원을 보태어주었다.

호송경관은 이상하게도 그 청을 곰상곰상 들어주었다.

권영벽은 호송경관이 사다 주는 과일과 당과류들을 동지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100여명의 투사들은 달리는 열차안에서 그 과일과 당과류들을 먹으며 말없는 눈빛과 미소로 정을 나누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만이 즐길 수 있는 정신적인 향연이었다.

호송경관들은 한가족처럼 친밀한 그들의 분위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란 참 별난 사람들이다. 당장 형벌을 받겠는데 인정을 나누는가? 그래 말해보라. 그렇게 하는 것이 공산주의인가?』

『그렇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식으로 산다. 일제를 타승하면 우리는 전민이 한형제로 되는 그런 나라를 건설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권영벽씨, 당국은 당신에게 그런 나라를 건설할 자유를 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아무 때건 교수대에 올라야 하니까.』

『내 한몸은 죽어도 나의 전우들이 반드시 그런 이상향을 건설할 것이다.』

권영벽은 그때의 이 주장을 공판정에서 다시한번 강조하였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우리는 조국강토에서 강도 일제를 내쫓고 우리 민족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항일대전에 나선 조선의 애국투사들이며 이 나라의 당당한 주인들이다. 누가 누구를 감히 재판하는가. 재판을 받아야 할 진짜 범인은 바로 너희들이 아닌가. 남의 나라를 강점하고 남의 나라 사람들을 마음대로 학살하고 남의 나라의 재물을 제멋대로 도적질해가는 너희들이야 말로 희세의 강도범들이고 살인범들이다. 역사가 공정한 심판을 내려 우리를 민족의 수호자로 받들고 네놈들을 매장해버릴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소련군이 동구라파의 약소국가들을 해방하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 미군의 폭격으로 도쿄의 거리들이 불바다로 되고 있을 때,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와 원동의 훈련기지에서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위한 대일작전준비를 다그치고 있을 때 권영벽은 서울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혁명만세를 부르며 최후를 마치었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일점혈육은 어언 열대여섯살의 사내애가 되어 청진거리에서 거름달구지를 끌고 다니고 있었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여름 나는 서울에 얼마동안 머무르며 남반부의 해방구사업을 지도한적이 있었다. 서울에 처음으로 가보는 나로서는 다녀보고 싶은 데가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곳은 다 제쳐놓고 서대문형무소부터 찾아갔다. 나의 친지들과 전우들중에는 그 형무소와 피맺힌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인민군용사들은 이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탱크로 형무소의 대문을 짓부시고 수인들을 해방시키였다.

서대문형무소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죄악과 범행의 수치스러운 대명사였다. 바로 악명높은 이 형무소에서 권영벽, 이제순, 이동걸, 지태환을 비롯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과감히 저항해 나섰던 조선민족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귀중한 생명을 잃고 한줌의 흙으로 되었다. 형권삼촌 역시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나는 산에서 싸울 때 나라가 해방되면 서울에 가서 그들의 묘지라도 찾아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소망을 해방이 된지 5년만에야 성취하게 된 것은 조국을 두토막으로 갈라놓은 38선때문이었다. 팻말도 없는 무덤들은 찾을 길이 바이 없었지만 그들의 피와 숨결이 어려있는 형무소의 지붕과 담벽만이라도 보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해방이 되어 5년세월이 흘렀지만 옛 전우들의 조의방문조차 받아볼수 없었던 동지들의 영령앞에서 나는 오래 참아왔던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나는 이 세상에 아들 하나를 남기고 간다. 나한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가 하던 일을 계속해 달라는 것이다.』

권영벽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전우들에게 이런 부탁을 남기었다.

형무소를 돌아보고 거리에 나서니 그 말이 새삼스럽게 종소리처럼 머리를 울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권영벽과 같이 한생을 값있게 산 혁명가들만이 남길 수 있는 고귀한 말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씩 그 말을 상기하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