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를 치고 귀로에 오른 대열이 구시골에 들어서자 대원들은 지휘관들을 통하여 나에게 하루의 휴식을 제의하였다. 그때까지의 항일전쟁행정에서 대원들이 사령부에 휴식을 요구한 전례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피곤이 겹쌓였으면 그들이 그런 제의를 하였겠는가. 사실 그 무렵에 우리 대원들과 지휘관들은 단 하루도 편안하게 쉬어본 적이 없었다. 곤장덕에 가서도 만 하루를 지냈지만 모두가 열에 떠서 잠을 자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피곤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전투가 일단락을 짓게 되자 어느새 대오를 지배하고 있던 탕개가 풀어진 것이다. 대원들과 지휘관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안정과 휴식을 바라고 있었다. 나 자신도 피로와 수면부족을 느끼었다.

그런데다가 구시골마을 농민들까지 우리 지휘관들을 보고 쉬다 가라고 권하였다. 떡도 치고 돼지도 잡았으니 마을사람들의 성의를 외면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시장기를 느끼고 있던 대원들은 떡과 돼지고기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래서 연대정치위원들까지 합세해서 구시골사람들의 성의를 받아주자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휴식을 선포할 수 없었다. 이런 때일수록 지휘관들은 각성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섰다고 하여 긴장을 늦춘다면 큰 변을 당할 수 있었다. 국경일대의 수비대에는 보나마나 비상동원령이 내리고 대소동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그 병력이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올지도 몰랐다. 적이 우리를 추격해오리라는 것은  전례로 보아도 명백한 일이었다.

적들이 우리의 뒤와 옆에 나타날 시간은 언제이며 앞쪽에 나타날 시간은 언제이겠는가.

대강 추산해보아도 구시골에서는 반시간이상 머물러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 몇채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마을이어서 수백명에 달하는 군대와 짐꾼들이 짧은 시간안에 식사를 해낼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전리품의 일부를 마을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배낭들에 주먹밥을 싸넣게 하였다. 동시에 짐을 지고 따라온 보천보사람들의 일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부대전원과 남아있는 짐꾼들을 데리고 구시산에 올랐다. 나는 어쩐지 싸움이 붙는다면 이 산에서 붙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구시산은 경사가 60도나 되는 물매가 급한 돌박산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기가 헐치 않았다. 앞사람이 실수해서 돌 한개만 굴려도 연쇄반응이 일어나 무서운 돌사태를 당할 수 있었다. 나는 백학림전령병을 시켜 돌을 굴리지 말라는 주의를 몇번이나 주었다. 누구나 손으로 앞사람의 발을 안전하게 잡아주고 밀어주면서 조심스레 경사를 톺아 올랐다.

나는 부대가 산꼭대기에 오르자 땀도 들이기 전에 전투배치부터 하였다. 지형의 특성에 맞게 돌싸움을 배합할 작정으로 전대오가 달라붙어 곳곳에 돌무지를 무져 놓았다. 그런 다음 주먹밥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게 하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리가 올라온 쪽으로 어느새 적들이 무리 지어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오가와 슈이찌가 이끄는 국경특설경비대 무력이었다. 오가와는 그 경비대의 대장이었다. 적은 제법 기세좋게 접근해왔다. 적이 우리 진지로부터 30미터가량 되는 곳에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사격구령을 내리었다. 고지위에서는 보총과 기관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나도 보총으로 조준사격을 하였다.

적들은 돌짬에 납작 엎드려 필사적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는 아무리 총을 쏘아도 효과를 낼 수 없었다. 나는 돌을 굴리라고 명령하였다. 대원들은 돌을 굴리기 시작했다. 소왕청방어전투때 뾰족산에서 한번 돌싸움을 해보고 구시산에서 다시 해보았는데 그 위력이 대단하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대원들은 싸움솜씨를 다시한번 잘 보여주었다. 보천보를 칠 때는 우리가 적들에게 반항할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싸움이 우리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구시산전투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적의 공격이 대단히 집요해서 싸움을 해볼만 하였다.

돌격나팔이 울리자 오백룡은 비호같이 달려 내려가 적기관총수부터 제껴 버리었다. 그리고는 내쪽을 향해 노획한 기관총을 힘있게 흔들어 보이었다. 김운신은 몸집이 장대한 적병과의 힘겨운 격투끝에 척탄통을 노획하였다.

우리의 타격이 어찌나 드셌던지 구시산 서쪽으로 뒤늦게 밀려오던 위만군부대는 겁을 먹고 달려들지 못하였다. 먼발치에서 눈먼 총을 몇방 쏘고는 싸움을 구경하기만 하였다. 나는 기관총수들에게 그쪽으로 공포를 몇방 쏴주라고 하였다. 위만군이 근처에서 어물거릴 때 헛총질을 하는 것은  간도에 있을 때부터 우리가 지켜온 하나의 관례였다. 위만군들 자신이 그렇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요구했었다. 우리가 그 요구를 지켜주면 그들도 혁명군을 「토벌」하지 않고 헛총질을 몇번 하다가 물러가군 하였다.

이날 방차대성원들도 구리다대위가 인솔하는 혜산수비대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보천보에서부터 짐을 지고 우리를 따라온 사람들은 구시산전투 전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인민혁명군의 위용앞에서 크게 감탄하였다. 그들은 적의 패전상도 똑똑히 보았다. 그때에 체험한 여러가지 사실들이 결국은 말없는 교양자료가 되었다. 짐꾼들은 구시산전투까지 목격하고 나서 인민혁명군의 전투적 위력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일본군이 자기를 「천하무적」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사실상의 천하무적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보천보전투와 구시산전투에서 우리 군대가 발휘한 싸움솜씨에 대해서는 다까기 다께오도 격찬하였다.

후에 박달이 나를 만났을 때 하는 말이 그때 구시산전투에서 살아남은 적들은 너무 혼이 나서 한동안은 어디에도 전혀 출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박달의 말에 의하면 구시산까지 왔다가 겨우 살아 돌아간 「토벌대」가운데는 그가 잘 아는 조선인순사도 한명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사가 아주 약삭바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순사는 구시산으로 오르면서 유격대의 신발자욱을 보고 산마루에 유격대가 틀림없이 매복해있으리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그는 각반을 고쳐매는 척 하면서 일본인순사들을 앞세우고 슬그머니 뒤에 떨어졌다. 일본인순사들이 산마루에 거의 도달하자 기관총소리와 수류탄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비명소리가 들리었다. 조선인순사는 산밑으로 도망하여 전투가 끝날 때까지 강가에 숨어있었다. 그는 이렇게 자기가 꾀를 잘 썼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박달에게 자랑하였다.

구시산전투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국경특설경비대장 오가와 슈이찌는 몇해전까지 일본에서 평범한 시민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말년에 그때의 패전상을 회고하는 글을 써냈다. 나는 그 글을 보고서야 오가와가 구시산에서 중상을 당하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 대원들의 총알이 그의 혀바닥을 뚫었다고 한다. 부상치고는 아주 괴망한 부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데 별로 효험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물지 않은 총상자리를 드러내 보인 오가와의 사진을 나도 보았다. 오가와 역시 구일본의 수많은 군경들과 마찬가지로 악명높은 「황도정신」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구시산에서 우리가 거둔 전투승리는 그후에 있은 간삼봉에서의 전과와 더불어 보천보전투에서 거둔 성과를 공고히 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전투적 위력과 불패성을 다시한번 시위하였다. 국경일대의 적들은 공포에 떨었다. 적들의 문건을 보면 구시산전투에서 그들이 「다수의 적」을 소멸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것은 완전한 날조이다. 우리측에서는 단 한명의 전사자도 없었다.

적들은 시체운반을 위해 구시산근방의 부락들을 돌아다니며 인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문짝과 이불을 닥치는대로 걷어갔다. 결국 우리는 혜산에 건너와서 치려던 적을 구시산에서 친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구시산전투는 우리가 당초에 혜산진공작전을 통해 달성하려고 하였던 목적을 다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우리는 구시산전투를 끝낸 후 포위에 들었다가 무사히 돌아온 최현부대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최현의 신발이며 옷주제를 보니 말이 아니었다. 그는 만나자마자 보천보와 구시산에서 우리가 거둔 성과를 떠들썩하게 축하해주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불쑥 꺼냈다.

『우린 이번에 베개봉근방에서 놈들의 포위에 들었댔는데 그놈들이 갑자기 포위를 풀고 달아나버리더란 말이오다. 장군님, 이게 어떻게 된 감투끈이요?』

나는 그동안 최현의 4사를 구출하기 위해 보천보를 치게 된 과정사를 간단히 말해주었다.

최현은 그 말을 듣자 껄껄거리며 웃었다.

『갸들이 물러가는걸 보구 귀신의 조화라고 생각했더니 결국은 장군님덕이었구만요. 거 정말 굉장하오다.』

그는 말끝마다 「갸들」이라는 대명사를 붙이었다. 그것은 그가 일본군경들을 멸시해서 곧잘 사용하는 비칭이었다.

나는 최현에게 4사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으니 안내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최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지금은 만날 형편이 못된다고 하였다.

내가 이유를 캐어묻자 그는 대원들의 몰골이 너무 험해서 그런다고 하였다.

나는 김해산을 불러다가 4사동무들에게 군복을 공급해주라고 지시하였다. 그 군복들은 국내진공을 앞두고 제작한 600벌중에서 최현부대의 몫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최현의 말과 같이 4사전우들의 옷주제는 과연 말이 아니었다. 그 남루한 옷차림과 볕에 탄 적동색얼굴들은 그들이 헤쳐온 고난에 찬 노정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최현은 새 옷을 입고 면도까지 한 다음에야 나한테 와서 정식으로 그동안의 활동정형을 보고 하였다. 전과가 간단치 않았다.

우리는 지양개에서 1군 2사동무들과도 상봉하였다. 2사도 자기 임무를 원만하게 수행하였다. 나는 4사와 2사 동무들에게 주력부대의 국내진공작전을 익측과 배후에서 후원하고 협조해준데 대하여 감사를 표시하였다. 서강회의의 결정에 따라 3개 방면으로 진출했던 혁명군부대들은 이처럼 회합장소로 내정되었던 지양개등판에 모여 전투적인 우애를 나누었다. 신록이 무르익는 등판은 명절처럼 흥성거리었다. 주고받는 이야기마다 신바람나는 무훈담들이었다.

서강회의방침을 실현하는 과정에 혁명군부대들이 거둔 전과를 직접 목격한 백두산지구 인민들의 기쁨은 참으로 각별하였다. 박달이네 조직선에서 들어온 통보에 의하면 갑산, 풍산, 삼수 일대에서는 혁명군이 자기네 고장을 해방시킬 날이 박두했다고 하면서 남녀노소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현의 보고가운데서 이채로운 것은 상흥경수리 7토장을 칠 때 잡아왔다는 가와시마라는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목재소는 혜산에 본부를 둔 한개 지소나 다름없는 작업장이었는데 가와시마는 거기서 현장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4사사람들이 그를 지양개까지 끌고 온 것은 그가 조선말을 잘하는 사람이고 또 조선여자를 데리고 사는 흥미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였으며 그를 인질로 삼아 경제모연공작을 해보고 싶은 속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최현은 가와시마의 운명 처리문제때문에 자기가 전광, 박득범 등과 언쟁을 했다고 하면서 그들이 가와시마를 처단하라고 자꾸 압력을 가하는데 장군님의 생각은 어떤가고 물었다.

나는 단마디로 처단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가와시마가 일본사람이기 때문에 처단해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억지요. 그가 재향군인으로서 목재소 현장책임자로 일한다고 해도 우리 인민에게 죄를 지은 것이 없다면야 무엇 때문에 처단하겠소. 사람들의 운명문제는 심중하게 다루어야 하오.』

최현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동감이라고 하였다.

그날 나는 가와시마를 직접 만나보았다. 말을 몇마디 건네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조선말을 더 잘하였다. 혁명군이 무섭지 않은가고 물으니 처음에는 조마조마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그는 일본당국은 유격대를 「비적」이라고 하는데 요새 혁명군을 따라다니는 과정에 그 선전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비적이라면 남의 재산을 빼앗겠는데 나는 그런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유격대는 오직 조선독립을 위해서만 애쓰고 있다, 며칠씩 굶는 때에도 주인없는 밭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어쩌다가 먹을 것이 좀 생겨도 동무들의 입에 먼저 넣어준다, 이런 군대가 어떻게 비적일 수 있는가고 하였다.

나는 최현, 전광, 박득범들에게 가와시마는 큰 죄도 없고 눈도 바로 배긴 사람이니 교양을 잘 주어 곱게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훗날 조직선에서 들어온 통보에 의하면 가와시마는 목재소에 돌아가서 『조선유격대는 비적이 아니라 기강이 뚜렷한 혁명군』이며 일본군대에 먹히울 약자가 아니라고 선전하였다고 한다. 그는 경찰에 연행되어 가서도 자기가 직접 본 사실이라고 하면서 우리에 대한 선전을 그냥 하였다.

경찰당국은 적색분자라는 딱지를 붙여 그를 일본으로 쫓아버리었다. 가와시마가 인민혁명군에 대해서 했다는 말의 골자는 그 당시 국내신문에도 소개되었다.

최현은 그 신문을 보고 나에게 『가와시마가 유격대에서 먹은 밥값을 단단히 하우다. 장군님이 왜 그를 놓아주라고 했는지 이제는 가늠이 가우다.』라고 하면서 크게 웃었다.

나는 가와시마의 실례를 통해서 비록 일본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나쁘게 보아서는 안되며 그들의 현행실태와 사상경향에 따라 심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부대가 지양개에 도착한 그날 19도구 구장 이훈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보천보와 구시산에서 거둔 전승을 축하하려고 마을사람들이 변변치 못한대로 음식을 좀 준비하고 있으니 군대와 인민이 한데 어울려 식사나 한끼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훈이 말꼭지를 떼는 품이 보통때처럼 점심이나 한그릇씩 대접하자는 것이 아니고 온 마을이 품을 놓고 한턱 차리겠다는 소리 같았다. 수백명의 유격대원들에게 밥 한그릇씩만 해먹인다고 해도 19도구사람들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페를 끼칠 수 없었다. 그래서 이훈더러 식사준비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 말이라면 늘 고분고분하던 이훈이 이번만은 고집스레 버티면서 인민의 지성인데 받아주어야지 이제는 딴도리가 없다고 통사정을 하였다.

『장군님, 이건 제 일개인의 청이 아니올시다. 19도구사람들의 민심이올시다. 이 청만은 제발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내가 장군님한테서 퇴짜를 맞고 가면 아낙네들까지 이 구장을 시라소니라고 몰아대고 돌을 던질 겁니다. 그건 글쎄 내가 참으면 되겠지만 온 마을에 울음판이 터질게 뻔한데 그건 어떡합니까?』

듣고 보니 구장의 청을 그냥 거절하기가 사실 난처하였다. 인민의 성의를 외면하고 지양개를 갑자기 떠나간다면 이 고장 사람들이 얼마나 섭섭해하며 유격대원들은 또한 얼마나 알찌근해 하겠는가.

나는 이훈에게 일이 이렇게 된 바에는 집집에서 음식이나 나누고 헤어지지 말고 차라리 군민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마음껏 즐기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오월단오도 다 되었는데 그날 군민연환대회라는 이름을 걸고 지양개등판에서 세상이 보란 듯이 청청대낮에 경축모임을 성대히 가지는 것이 좋겠다, 군대와 인민이 한데 어울려 서로 고무하고 정을 나누게 하자, 하늘땅이 들썩하게 오락회도 열고 운동회도 열어 그날은 모두가 만가지 시름을 다 털어버리고 단오명절을 즐길 수 있게 하자고 하였다.

이 제안에 대해서는 4사와 2사의 지휘관들도 찬성하였다. 뜻을 이룬 이훈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유격구가 해산된 후 군대와 인민이 한자리에서 어울리는 합동행사를 시도해 본적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군민연환대회장소로 내정된 덕부골은 이제순, 김운신, 마동희, 김주현, 지태환, 김일 등이 개척한 혁명촌이었다. 현으로부터 수십리 떨어진 등판에 위치하고 있어 순사나 구장들도 자주 오지 못하는 고장이었다. 적통치기관들도 비교적 멀리에 있었다. 덕부골에서 제일 가깝다는 주재소가 우럭골에 있었는데 우럭골과 덕부골사이의 거리는 산길로서 퍼그나 멀었다. 우리는 덕부골을 회합장소로 선택할 때 이런 점들을 충분히 타산하였다. 덕부골에서는 훗날 유격대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나는 50여명의 병사, 지휘관들과 함께 조국광복회 지회장 안덕훈네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이제순이 19도구에서 맨처음으로 손을 잡은 사람이 바로 이훈과 안덕훈이었다. 우리는 보천보전투 이전에도 이 집에 들렸고 그 이후에도 이 집에 들려 많은 신세를 지고 갔다. 안덕훈이네 일가는 유격대원호를 잘하는 집안이었다. 그의 동생 안덕수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사업을 아주 정열적으로 도와주었다.

덕부골에는 송가성을 가진 부자가 있었다. 그는 나라야 어떻게 되든 자기만 잘살면 된다는 인생관을 가진 친일성이 강한 지주였다. 이 부자에게 돈이 많다는 것을  내탐한 우리 공작원들이 하루는 안덕훈이네 집에다가 송가와 이훈을 불러다 놓고 유격대를 원호해달라고 호소하였다. 공작원들이 그 자리에 지하조직원인 이훈이까지 불러들인 것은 그럴만한 타산이 있어서였다. 이훈이 먼저 얼마만큼 내겠다고 하면 송가도 아닌보살을 할 수 없을것이었다. 그리고 공작원들이 이훈을 보고 떡떡거리게 되면 지하조직원으로서의 그의 정체도 더 잘 위장해줄 수 있었다. 일은 예상대로 되었다. 이훈이 먼저 동리를 대표하여 얼마를 내겠다고 하자 송가는 공작원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150원을 내겠다고 대답하였다. 사실은 후환이 있을 것 같아서 마지 못해 내는 돈이었다.

송가는 공작원들에게 150원을 넘겨준 것이 속에서 내려가지 않아 그 앙갚음으로 안덕훈이네 집에 유격대공작원들이 많이 드나든다고 주재소에 다니는 처남에게 넌지시 귀띔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훈은 공작원들과 의논하여 안덕훈을 유격대에 보내고 그의 가족들은 조선으로 빼돌리었다. 그런 구급대책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안덕훈일가는 틀림없이 멸살을 당하였을 것이다. 1937년 여름인가 가을에 적들은 「빨갱이촌」이라는 구실밑에 덕부골마을을 모조리 불태워버리었다.

나는 안덕훈의 집에서 19도구의 유지들, 2사, 4사의 지휘관들과 함께 군민연환대회의 일정을 심화시킨 세부안을 작성하였다. 마을청년들은 그때 국수분틀을 50여개나 만들었다. 군대와 인민이 집집마다 한자리에 모여 밤이 지새는 줄도 모르고 노래도 부르고 고담도 나누었다. 천봉순의 보천보정찰담은 매번 폭소를 자아냈다.

1937년 5월말에 천봉순은 우럭골출신의 유격대원인 김운신을 통하여 보천보시내의 적의 무장장비와 무력배치 상태를 알아내라는 우리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보천보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친척을 통하여 경찰관주재소에 7명의 순사가 있으며 경기관총은 1정이라는 것, 산림보호구에는 5명의 일본인이 있는데 주임은 인차 다른 데로 전근되어간다는 것, 시내에 있는 집은 대략 200호가량 된다는 것을  알아 내였다. 그런데 이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서는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느날 천봉순은 보천보시내에 들어가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고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주재소앞에 있는 잡화상점으로 찾아갔다. 그는 술에 몹시 취한척하면서 1원짜리가 있었는데 어디에 갔을까 하고 중얼거리며 후들거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지였다. 그리고는 5원짜리 한장을 꺼내들고 『옳지, 여기 1원짜리 한장이 있군.』하면서 「마꼬」담배 한갑을 요구하였다. 그 당시 「마꼬」 한갑 값이 5전이었다. 5원을 냈으니 거스름으로는 응당 4원 95전을 주어야 하였다. 그런데 엉큼한 여주인은 천봉순이 술에 잔뜩 취해서 5원짜리와 1원짜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줄로만 알고 95전만 던져주었다. 일은 천봉순이 바라는대로 되어가는 셈이었다. 그는 여주인에게 5원짜리를 냈는데 왜 거스름돈을 95전만 주는가, 4원을 더 내라고 요구하였다. 여주인은 어디서 이따위 협잡군같은놈이 나타났는가,  1원을 내고도 5원을 냈다고 하니 천하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고 하면서 허튼수작말고 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말다툼이 벌어졌다. 5원이라거니, 1원이라거니 하면서 싱갱이질을 하다가 여자쪽이 주재소맛을 보지 못해 그러는가고 위협할 때 천봉순이 그러면 순사나리들한테 가서 결판을 짓자고 하였다. 상점주인여자는 주재소측이 자기편을 들어주리라고 생각했던지 그 제의에 선뜻 응해 나섰다.

두 사람은 주재소에 들어가서도 계속 상욕질을 해대며 말다툼을 하였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바람에 주재소측도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 사람의 말싸움을 구경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천봉순은 순사가 몇 놈이 있고 기관총이 몇 정 있으며 보총이 몇 자루가 있는가를 다 탐지해냈다. 그는 확인할 것을 다 확인하자 그러면 순사나리들이 우리와 같이 상점에 나가자, 내가 낸 5원짜리는 복판에 종이를 오려 붙인 것이다, 그런 돈이 있으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없으면 저년이 이기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당직순사를 앞세우고 다시 상점으로 나갔다.

천봉순이 말한대로 돈궤속에서는 정말 복판에 종이를 오려 붙인 5원짜리 돈이 나왔다. 그러나 상점주인은 그 돈은 아침에 다른 손님한테서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냥 생억지를 썼다. 결국 이 송사질에서는 상점주인여자가 이기였다. 천봉순은 그 여자에게 『마님, 익은 밥 먹고 선트림을 하면서 호강하시오.』하고는 상점문을 나섰다. 그는 속으로 상점주인을 정직하지 못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맙게 여기였다. 그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주재소로 들어갈 수 있는 구실을 찾지 못할 번 했기 때문이었다.

덕부골의 지하조직원들은 천봉순의 정찰담을 듣고 힘을 얻었다. 그 정찰담은 그들의 자부심을 높여주었다. 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을 보장하는데서 자기네 마을의 지하조직원이 한몫하였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온 동리가 연환대회준비로 분주한 때에 흥을 깨는 정찰정보가 들어왔다. 위만군 혼성여단장이 인민혁명군을 「토벌」하겠다고 하면서 장백을 떠나 한가구쪽으로 출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최현과 함께 맞받아 나가서 그 부대를 일격에 소멸하였다. 여단의 패잔병들은 혁명군의 습격을 받고 어찌나 혼쌀이 났던지 자기네 동료들이 무리죽음을 당한 그 싸움터에 난 길을 가리켜 「낭아도」라고 하였다. 「낭아도」란 「이리의 이발같은 길」이라는 뜻이다.

이 전투를 통하여 혁명군의 위신이 다시한번 올라갔다. 노획한 전리품들중에는 연환대회준비에 보탬을 줄 수 있는 식료품들이 많았다.

날씨도 청청한 오월단오날 지양개등판에서는 군민연환대회가 열리었다. 3개 부대가 한데 모이니 넓은 등판이 군대로 가득찼다. 조국광복회 회원들만도 수백명이나 모이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에서도 대표를 파견하였다. 각 부락의 구장들이 비밀보장을 위해 적의 앞잡이들을 사전에 따돌렸기 때문에 대회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날은 군대와 인민이 자리를 가리지 않고 한데 어울리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 많아서 무엇보다도 기뻤다. 음식들을 벌려놓고 빙 둘러앉아 마음껏 즐기었다. 그날 인민들이 마련한 음식가운데서 제일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쑥떡과 수리취떡이었다.

나는 최현과 함께 이훈, 안덕훈의 안내를 받으며 노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 다음은 청장년들, 아낙네들의 곁을 지나가며 그들에게 두루거리로 인사를 하였다. 그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을 성심성의로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날 어떤 여대원들은 조선치마저고리차림으로 행사장에 나타났다. 낮이나 밤이나 벗을 수 없었던 군복을 잠시나마 벗어놓고 향토시절로 돌아간 그들의 모습은 정말 선녀와 같이 아름다워 보이었다. 그들은 마을처녀들과 함께 쌍그네도 뛰었다. 숲속에서는 노래소리가 울리고 춤판이 벌어졌다. 양푼에 물을 떠다 놓고 바가지장단을 치는 여인들도 있었다.

난생처음 만난 사람들이 어찌하여 오랫동안 생이별하였다가 다시 만난 혈육처럼 저렇게 뜨거운 정으로 얽힐 수 있을까. 나는 그날 군민이 한데 모여 꽃밭을 이룬 지양개등판의 정경을 둘러보면서 이런 생각에 잠기었다. 적들은 우리를 고립무원한 존재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헌신적인 사랑과 지원이 파도치는 인민의 바다에 떠있었다. 지양개등판에 펼쳐진 군민합동경축모임은 유격대는 인민의 사랑을 받고 인민은 유격대의 보호를 받으며 험난한 역사의 가시밭을 헤쳐온 항일혁명의 축도였다.

나는 그날 인민혁명군을 대표하여 연설을 하였다. 군대와 인민은 떨어져 살래야 살수 없는 일심동체이기 때문에 혁명군이 건재할 수 있고 백전백승한다는 사상으로 일관된 짤막한 즉흥연설이었다. 어느 대목에서인가는 국내진공작전에 대해서도 간단히 개괄했던 것 같다.

그날 국내에서 온 조직대표도 연설을 하였다.

각계인사들의 연설이 끝난 다음 우럭골에서 왔다는 노인이 장백현 조국광복회 조직을 대표하여 우리에게 축기를 전달하였다. 보천보전투때 정찰임무를 잘 수행한 마동희가 위임에 따라 축기를 받았다. 붉은 양단천에 노란 명주실로 글을 새긴 자그마한 그 축기는 신흥촌의 부녀회성원들과 박록금이 감자움속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밀정들이나 군경들이 언제 달려들지 몰라 움밖에 보초를 세우고 한뜸한뜸 수를 놓았다는 말도 있다. 박록금과 같은 여공작원에게 그런 수놓이재간이 있었다는 것은  참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날의 군민연환대회는 성대한 열병식으로 막을 내리었다. 그것은 항일전쟁개시이래 우리가 거행한 여러 차례의 열병식들중에서도 비교적 규모가 큰 열병식이었다. 1948년에 있었던 열병식과 전승열병식 때에 나는 그 단상에서 바로 지양개등판의 열병식을 감회깊이 돌이켜보았다.

지양개군민연환대회는 군민의 위대한 정치적단결력을 만천하에 보여준 회합이었다.

이 연환대회에 참가했던 인민들은 1940년대 전반기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혁명군이 다 소멸되었다고 선전할 때 그것을 누구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지양개군민연환대회가 인민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가를 증명해준다. 항일유격대원들 역시 인민이 자기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후 곤경에 부닥칠 때마다 인민들을 찾아가군 하였다.

그런데 그날 김철호를 비롯한 4사의 몇몇 대원들만은 식량난으로 걸음이 늦어져 이 성대한 연환대회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모임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몹시 허전하고 아쉬웠다.

여러 해가 지나 해방된 조국에서 단오명절을 쇨 때 나는 김정숙과 함께 그들을 모두 집에 초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