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곳은 장백현의 지양개등판이었던 것 같다. 군민연환대회가 끝날 무렵에 여러 동무들이 세개부대가 함께 만난 기념으로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마침 4사에 사진기가 있었다. 그래서 각 부대들에 있는 기관총을 다 모아다가 앞에 쭉 벌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표창이나 받은 것처럼 흡족해하였다.

그런데 어린 대원들은 한 장쯤 찍는 것으로는 도무지 성차해하지 않았다. 독사진도 찍고 싶어했고 분대별로 집체사진도 찍고 싶어했으며 오래간만에 만난 다른 부대의 딱친구들과 함께 상봉기념으로도 찍고 싶어하였다. 어떤 경위대원들은 나하고 단둘이서 찍고 싶어 안달아 하였다.

그러나 무뚝뚝한 사진사는 사진기를 걷어 메고 멀찌감치 가버리었다. 하기는 그도 몹시 난처했을 것이다. 요청자는 많고 사진종판은 적은데 누구를 찍고 누구는 찍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린 대원들은 볼이 부어 돌아갔다. 나는 사진사를 다시 불러오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그럴만한 시간여유가 없어 단념해 버리고 말았다.

사진을 못찍어 섭섭해하는 어린 대원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그 시절이야 누구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때가 아닌가. 내 마음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사진을 얼마 찍지 못하였다. 타개죽도 변변히 먹지 못하는 형편에 사진이 다 무엇인가. 그때까지만해도 만경대일대에는 사진관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진을 한장 찍자면 30리나 되는 평양성안이나 뺑대거리에 가야 했다. 간혹 성안의 사진사들이 세다리사진기를 메고 시주변에 나와 돈벌이를 할 때도 있었지만 만경대같은 외진 부락까지는 오지 않고 칠골 같은데 왔다가 돌아가군 하였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인데 한번은 할아버지가 나에게 용돈으로 5전을 준적이 있었다. 난생처음 돈이 생긴김에 30리길을 걸어 평양성안으로 갔다. 나는 성안의 번창한 풍경에 넋을 빼앗기었다. 도로양옆의 가게방들과 장마당들에는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광주리장사군들의 『사구려!』소리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사진관을 향해 발길을 돌리었다.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5전을 쥐고 사진을 찍으려고 한 것은 천진란만한 생각이었다. 신식옷을 쭉 뽑아 입은 신사숙녀들이 출납구앞에 서서 종이돈을 벌컥거리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못올 데를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황황히 사진관에서 나와버렸다. 5전으로 문명의 맛을 보겠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망상이었다. 그날 내가 사진관을 떠나면서 느낀 것은 온 세상이 돈에 짓눌려 꺼져 내리는 것 같은 환각이었다. 내 자신도 그 무게에 눌려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그후부터 나는 성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사진관을 외면하였다.

길림시절에도 사진과는 될수록 담을 쌓고 살았다. 영화관에 가는 일은 있어도 사진관은 넘겨다보지 않았다. 길림육문중학교에는 부잣집 자식들이 많았다. 그들은 유흥가나 음식점, 공원 같은 데를 늘 풍청거리며 돌아 다니었다. 식도락이나 유흥을 위해 돈을 물쓰듯 하는 그들의 풍족한 소비생활은 나를 아연케 하였다. 어머니가 푼전을 모아 마련하여 보내어주는 학비로는 겨우 월사금이나 물 수 있는 형편에 있던 나에게 있어서 제일 괴로운 순간은 그들이 사진관이나 식당으로 가자고 하면서 내 팔을 잡아 끌 때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적당한 구실을 붙여가면서 그들의 청을 밀막아 버리군 하였다.

한번은 어머니한테서 송금통지서와 함께 이런 편지가 왔다.

『돈을 조금 더 보내니 생일기념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다구. 너를 보고싶을 때 사진이라도 한장 있으면 오죽 좋겠느냐.』

나는 어머니의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주동생의 말이 어머니는 내가 보고싶을 때면 다 해진 나의 속옷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지으신다고 하지 않는가. 얼마나 이 아들이 보고싶으면 학비에 돈을 더 얹어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하셨겠는가.

나는 어머니의 분부대로 사진을 찍어 무송에 보내주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바로 지금 유일하게 남아있는 길림육문중학교시절의 독사진이다. 그 사진을 수십년동안 간수해 두었다가 우리 나라 혁명전적지답사단이 중국 동북지방에 갔을 때 내놓은 사람이 내가 무송시절부터 잘 아는 부녀회원인 채주선이다. 그가 오랜 세월 적들의 살벌한 감시를 받으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사진을 보관해낸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후에도 이럭저럭 사진을 몇장 찍었지만 대부분은 분실되고 별로 남은 것이 없다. 다부산자를 입고 고재룡과 함께 찍은 사진이 몇해전에 발굴되어 회고록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길림시절에 찍은 내 사진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인지 적들의 수중에 들어가 경찰들의 수사작전에 이용되었다. 한번은 밀정이 내 사진을 들고 카륜에까지 와서 마을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소년탐험대원들에게 이런 사람을 본적이 없는가고 물어보기까지 하였다. 아이들이 밀정이 왔다고 제때에 연락해준 덕으로 나는 요행 봉변을 모면하였다. 우리를 해치려고 돌아 치던 그 밀정은 조선혁명군 대원들에 의하여 처단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한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사진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은 아니었다.

때없이 이루어지는 상봉과 이별, 경사… 이런 것에 맞다 들면 사진으로 남겨 두고두고 추억하고 싶은 생각이 들군 하였다.

나의 지하활동과 유격대생활에는 사진으로 찍어둘만한 극적인 것이 많았다. 유격구시절에도 인상깊은 광경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의 어느 한 장면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하였다. 그때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누구나 앞날을 위하여 어떤 기념물이나 상징적인 증거물 같은 것을 남길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투쟁이 간고한데다가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들이 연달아 들이닥치다보니 색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경황이 없었다.

하지만 절해고도에 떨어져도 인생은 인생이라는데 유격대생활이라고 하여 노상 메마르게만 살라는 법이야 없지 않은가.

어린 대원들이 사진을 더 찍고 싶어하는 광경을 보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4사에는 사진기가 있는데 내가 데리고 다니는 부대에 사진기가 없다는 사실이 우선 나로 하여금 자기를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늘 산에서 살며 안중에 혁명밖에 없는 대원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찍고 싶어하며 더구나 그 갈망이 보통정도가 아닌 것을 보니 오래 전부터 사진과 담을 쌓고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숙소에 돌아와서 몇몇 지휘관들에게 어린 대원들이 사진을 찍고 싶어 4사의 사진사를 따라다니면서 시중을 들어주던데 우리도 사진기가 한대 있기는 있어야겠다는 말을 하였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는데 그 말이 놀라운 효과를 나타내었다.

우리가 장백을 떠나 임강현 6도구밀영에 가있을 때인 1937년 여름이었다. 하루는 장백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지태환이 밀영에 나타나 사업보고를 하다가 뜻밖에도 사진기를 구해왔다는 말을 하였다. 그때 나는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지태환이 구해왔다는 사진기는 4사 동무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꼭같은 캬비네형삼각대사진기였다. 그는 중년나이의 사진사도 한명 데리고 왔다. 지태환은 아마 내가 얼핏 내비친 말을 명심하고 깊이 새겨두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지태환은 김일이 지방사업을 하는 과정에 찾아내고 단련시켜 우리 부대에 보내온 사람이었다. 김일처럼 그도 입이 무겁고 실속이 있었다. 무슨 과업을 받아 안기만 하면 실농군처럼 수걱수걱 해냈다. 김일과 지태환은 성격이며 일솜씨며 행동거지까지도 신통히 비슷하였다.

지태환에게서 사진기를 노획해온 과정사를 들었는데 모험소설의 줄거리처럼 재미가 있었다.

지태환은 김학철이라는 유격대원과 함께 처음에 19도구 구장인 이훈을 찾아가 사진기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의논하였다. 구장은 그곳 조국광복회 회원들과 함께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던중 하루는 이훈이 지태환을 찾아와 주민들의 거민증을 내고 주민등록을 하는데 쓸 사진을 찍으려고 20도구경찰분서에 사진기 한대를 가져다 놓았다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그 사진기를 슬쩍 빼내올 수만 있다면 유격대에서도 요긴하게 쓸 수 있고 주민등록놀음도 그만큼 지연시킬 수 있으니 꿩먹고 알먹기라는 것이었다.

일제는 동만에서 실시해온 집단부락제도와 중세기적인 「보갑제도」를 서간도에서도 강행하려 하였다. 그래서 호구조사도 하고 증명사진촬영놀음도 벌이였다. 적들은 그밖에도 통행<체류>허가증, 물품구매허가증까지 만들어가지고 인민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15살부터 65살에 이르는 사람은 거민증과 통행허가증이 없이는 거주도 통행도 할 수 없었고 물품구매허가증이 없이는 식량이나 천, 지하족 같은 것도 마음대로 살수 없었다. 그런 증명서가 없이 상품을 산 것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통비분자」로 몰아 다짜고짜로 묶어갔다.

그런데 경계가 삼엄한 경찰분서마당에 있는 사진기를 어떻게 빼내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지태환과 이훈은 장시간 이마를 맞대고 묘책을 토론하였다.

다음날 이훈은 크게 낭패한 기색으로 20도구경찰분서장앞에 나타나 이제는 애가 타서 구장노릇도 못해 먹겠다고 두덜거리었다. 농군들이라는 것이 무식하다니 경찰분서에 가면 사진을 찍어준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하는데도 믿지 않고 구장만 나타나면 포도대장을 만난 것 만치나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니 맥이 빠져서 못해 먹겠다고 하였다.

분서장은 그 말을 듣고 입만 쩝쩝 다시었다.

『유지들은 또 유지들대로 잔뜩 비틀어져 있수다. 19도구 100리골안의 수백여 세대를 20도구까지 끌고 가서 사진을 찍느라면 가을이 다 갈텐데 낟알걷이는 집어치우고 사진이나 씹어 먹으라는가고 다들 삿대질이니 이것 참, 어떡했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수다.』

이훈은 이런 말을 하고 나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구장도 참 답답해. 분서에 와서 송사질을 하면 난들 어떻게 하라는건가. 대책이야 구장이 세워야지 무슨 방도가 없겠소?』

이훈이 기다린 것은 분서장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한참동안 머리를 쥐어짜는 척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 경찰분서는 백성들이 무서워하고 19도구에서 거리가 너무 먼 것도 사실입니다. 차라리 19도구에 사는 이종술이네 집이 어떻습니까? 그 집 마당이 널직해서 사진을 찍기는 명당입지요.』

이종술은 적들의 주구였다. 경찰들과 관리들이 가면 술대접을 극진하게 해주어서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가고 싶어하는 곳이었다. 분서장은 명안이라고 하면서 이훈의 제의를 지지하였다. 이렇게 되어 사진기는 경계가 엄한 20도구경찰분서로부터 이종술이네 집 마당으로 옮겨졌고 19도구주민들도 그 마당에 모이게 되었다.

분서장 역시 순사들을 데리고 이종술이네 집으로 향하였다. 이종술이 순사들을 위해 주안상을 차린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분서장은 순사 한 사람을 마당에 세워두고 술상에 마주 앉았다. 얼마 후에는 망을 보던 순사까지 술판에 끼어 들었다.

경찰들이 술에 취해서 법석 떠들어댈 때 마을의 지하조직원이 방문을 와닥닥 열어 제끼며 「비적」들이 사진기를 들어간다고 소리쳤다. 「비적」들이 앞산, 뒷산에 누렇게 깔렸다고 그가 엄살을 떠는 바람에 분서장은 사색이 되어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제법 돌격해 나갈 태세를 취하였다. 술기운의 덕으로 생겨난 만용이었다.

이훈은 분서장을 제지시키었다.

『「비적」이 한두 명도 아닌데 혼자서 무슨 수로 당한다고 그럽니까. 몸을 보존해야지요.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는데…』

그는 분서장을 뒤울안으로 끌고 나가 무작정 돼지우리에 밀어 넣고 북데기를 씌워주었다. 다른 순사들도 재간껏 몸을 숨기었다.

그사이에 유격대원들은 촬영현장에 나타나 사진을 찍으러 온 주민들에게 선동연설을 한바탕 한 다음 사진기를 메고 유유히 사라졌다.

사진기공작에 동원되었던 대원이 이런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어서 나는 눈물이 나게 웃어보았다.

「대안 (비적) 상황에 관한 건」과 「혜산사건판결서」라는 일제의 비밀문건에는 이런 내용의 기록이 있다.

『소포도구에 이르러 주민 100명을 모으고 촬영중에 1시 30분 경 권총휴대의 김일성일대로 인정되는 사람들이 나타나 사진사에 대하여 「무슨 목적으로 사진을 찍는가」, 「당신은 사진사로 생활하므로 도와주면 도로 보내겠으니 사진기만 내라」고 하고 사진기와 종판 한타스를 빼앗아갔다.』

종판이란 지금의 사진필름 같은 것이다. 구식사진기에서는 필름대신 유리종판을 썼다.

그러고보면 지태환이 김학철, 이훈과 함께 우리의 소원을 훌륭히 풀어준 셈이었다.

지태환이 적구에서 데려온 사진사의 이름은 한계삼이라고 하였다. 유격대에서는 그를 이인환이라고 불렀다. 그는 나이가 40살이 다 되어 오는 사람이었다. 키가 큰데다가 힘이 장사여서 유격대생활에는 제격이었다.

나는 사진기술을 배워두었다가 필요할 때면 직접 대원들의 사진을 찍어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사진사에게서 개별적으로 사진술을 익히었다.

이인환은 내가 사진술을 진지하게 대하자 왜 이런 하찮은 일에 시간을 내는가고 묻기까지 하였다.

그는 촬영할 때 화폭을 예술적으로 잡는 방법이며 종판을 감광시키는 묘리도 가르쳐주었는데 아주 친절하고 까근까근하였다.

이인환은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안 다음부터는 자기 속을 다 털어놓았다. 그가 한 말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인상깊게 남아있는 것은 「버섯꿰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우리 부대에 오자마자 「버섯꿰미」라는 것부터 찾았다고 하였다. 「버섯꿰미」란 무엇인가고 물으니 『귀를 베여 말린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인환의 말에 의하면 적들은 혁명군이 사람을 잡으면 귀를 베어 버섯꿰미처럼 꿰서 말린다고 선전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산하에 각종 분과를 거느린 「선무반」이라는 모략단체까지 조직해가지고 다니면서 유격대는 얼굴이 빨갛고 뿔이 돋은 식인종들이라고 선전하는데 자기도 얼마 전까지는 그런 말을 곧이 들었노라고 하였다.

『이종술이네 마당에 유격대가 나타났을 때 나는 간이 콩알만 해서 검정보자기를 뒤집어쓴 채 와들와들 떨었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귀부터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격대를 보니 선량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인환이네 집에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다. 그런데 그가 오히려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식들은 처가 돌볼 수 있으니 제발 자기를 쫓아 보내지 말아 달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그 결심이 하도 진실하고 드팀이 없으므로 나는 이인환을 유격대에 입대시키었다. 새 군복을 입히자 어찌나 좋아하는지 옆에서 보기에도 흐뭇하였다.

육과송전투와 쟈신즈전투가 있은 다음 우리는 부대에 많은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고 신입대원들로 여러 개의 분대를 조직하였다. 그중 한 분대의 분대장을 이인환이 하였다.

그는 입대 후 유격대원들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인환은 현상액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족족 현상하군 하였다. 그가 싸움도 잘하였기 때문에 대원들은 누구나 다 그를 존대하고 아끼고 사랑하였다.

한번은 사진사가 독감으로 드러누운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그가 잠잘 때에는 저마다 솜옷을 벗어 여러 겹으로 덮어주었다. 나도 덮개를 그의 머리에 둘러주고 곁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밤샘을 하였다.

잠을 깬 사진사는 내 손을 부여잡고 저 같은게 무엇이 대단해서 이러는가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는가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사진사는 우리와 생활하는 과정에 난생처음 사람대접도 받고 참 인생이 무엇인지도 알았다고 하면서 왜놈들의 머슴이 되어 밥을 얻어먹는 것보다 유격대에서 풀뿌리를 삼킬망정 하루를 살아도 가슴을 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

한번은 사진사가 내앞에 사진기를 마주세우고 나의 옷차림을 깐깐히 손질해주면서 말하였다.

『오늘은 제 소원을 풀게 해주십시오. 장군님의 독사진을 찍으려고 합니다.』

그는 나의 사진을 찍어 직접 국내에 가지고 들어가 동포들속에 전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성은 고맙지만 사진을 찍어 세상에 공개하는 것은 부대의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니 혁명이 승리하는 날 마음껏 찍자고, 해방이 되면 첫 독사진을 이인환동무가 찍어 달라고 하였다.

그 말에 사진사는 울면서 웃었다. 나는 그런 미묘한 웃음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

소할바령회의후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넘어갈 때 우리는 또다시 이인환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대에 그냥 남아서 싸우다가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나는 지금도 사진을 찍을 때면 이인환이 구식사진기를 메고 사진을 찍자고 하면서 내 앞에 다가와 초점을 맞추는 것 같은 환각을 가끔 느끼군 한다.

이인환은 희생되었으나 그가 찍은 사진들중에서 몇장은 그래도 기적적으로 역사에 남았다. 우리가 임강현 5도구밀영에서 찍은 사진과 올기강유역에서 여대원들이 찍은 사진도 그가 찍고 현상한 것이었다.

5도구밀영에서 찍은 집체사진은 국내공작에 나갔던 김주현소부대의 귀환을 기념하여 찍은 것이었다. 그 날의 사진은 내가 찍어주려고 하였는데 경위대원들이 같이 찍자고 그냥 조르는데다가 이인환도 샤타를 자기가 눌러주겠으니 같이 찍으라고 등을 밀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변장을 할 때 쓰고 다니던 검은테안경을 낀 채로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와 이인환이 찍은 사진들가운데서 대부분은 아수하게도 소실되거나 분실되었다. 적들은 사진을 입수하기만 하면 그것을 우리를 지명수배하기 위한 모략에 써 먹었다. 나와 우리 경위대원들이 보관하고 있던 사진들은 임수산이 「토벌대」를 끌고 황구령밀영에 달려들었을 때 없어졌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 우리는 그 사진들 중 일부를 과거 만주국의 고위경찰관이었던 가또 도요다까라는 일본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우리의 사진 석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장은 잃어버리고 두장만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공개하였다.

가또 도요다까는 「만주국경찰 중요사진, 문헌자료 집성」이라는 글에서 「신비로운 항일영웅 김일성」이란 제목으로 이렇게 썼다.

『…김일성 및 중국공산당간부에 대한 「수배사진」은 무엇보다도 현물로서 현실적 의의를 충분히 가지는 극히 중요하고 희소한 것이다.…』

그는 당시 「토벌」대원이 사진뒷면에 남긴 「김일성부대 본부원일동」이라는 필적까지 사진옆에 옮겨 소개하였다.

그 덕에 역사의 진실이 생생한 화폭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거기에는 마귀나 야인 같은 스산한 「비적」이 아니라 대원, 지휘관들을 막론하고 꼭 같은 군복을 입은 혁명군대의 면모가 사실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대원들과 지휘관들중에는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하고 전사한 동무들이 수없이 많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전사자가 나면 군공에 따라 표창도 하고 고향에 부고도 보내어 사회적 관심을 모은다. 그러나 항일전쟁당시에는 희생자가 나도 부고를 보낼 수가 없었고 이름석자를 새긴 묘비도 세워줄 수 없었다. 적이 항시적으로 달려드는 정황에서 눈무덤이나 돌무덤을 쌓아주거나 그렇게도 할 겨를이 없으면 솔가지를 덮어주고 총총히 떠날 때도 있었다.

전사한 대원들을 안장할 때면 그 불같은 청춘을 황야에 묻어버리는 것이 너무도 기가 막혀 한줌의 흙이 바윗돌처럼 무거웠다. 한장의 사진도 없이 그렇게 가버린 열사들이 그 얼마이던가.

희생된 전우들과 헤어지는 것도 헐치 않았지만 산사람들과의 생이별도 뻐근하였다. 그런 때에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 서로 교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여대원들이 그 꽃같은 모습을 한장의 사진에도 남기지 못하고 희생되는 것이었다. 그런 여대원들이 피를 물고 쓰러질 때 우리의 가슴은 천갈래만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이 세상에 남기고 간 것이란 배낭 하나밖에 없었다. 그 속에 있는 것은 조선지도에 무궁화를 수놓은 자그마한 수예품 뿐이었다.

그 수예품을 시신위에 얹고 거기에 한줌두줌 흙을 뿌릴 때 어느 장사의 손인들 떨리지 않겠는가.

세월은 너무도 많은 것을 마사 버리고 희석화하여 망각속에 묻어버린다. 기쁘던 일도 슬프던 일도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면 흐려지고 멀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는 희생된 전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떠나간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그렇듯 소금이 일게 한을 품었던 탓일까. 내 기억속에는 그들의 모습이 수백수천장의 또렷한 청사진으로 남아있다. 세월이 흐르면 사진도 색이 날고 기억도 희미해지기 마련이건만 그들의 모습만은 어인 일인지 세월이 갈수록 더 생생하게 살아올라 나의 심혼을 거머잡는다.

어떤 사람들은 대성산에 혁명열사릉을 꾸릴 때 기념비를 웅건하게 잘 세우고 거기에 투사들의 이름을 새기자는 의견도 내놓았다. 그러나 나는 열사들의 모습을 세워주고 싶었다. 항일영웅들의 개성적인 모습을 재생시켜 후대들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투사들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결국 내가 조각가들에게 그 투사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어 원형을 재생시키도록 하였다.

일제가 취급한 「혜산사건」에 대한 자료집을 보니 거기에 여러 투사들의 사진이 나있었다. 고리끼가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의 사진은 그가 법을 위반했을 때에나 신문에 난다고 하였던 것 같은데 우리의 투사들도 족쇄를 차고서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되는 사진을 남겼던 것이다.

우리가 항일혁명시절의 모습을 몇 장이나마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지태환이 사진기를 공작해온 덕이었다. 그런데 지태환자신은 사진기앞에 나선적이 없었다. 견결하고 솜씨있는 지하정치공작원이었던 그는 「혜산사건」때 체포되면서 적들의 문건에 비로소 사진을 남기었다.

지태환은 포승에 묶이운채 사진을 찍히웠는데 분통이 어린 얼굴을 외로 돌린 채 날카로운 시선을 땅에 박고 있었다. 자부심이 남달리 강한 그 사나이의 심장이 얼마나 원한으로 끓어올랐겠는가.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태연하였다. 지태환은 『나는 일제놈들에게서 피값을 다 받아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잠들 수 없는 밤이 많다. 일이 많을 때도 그렇지만 유물 하나, 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하고 간 열사들이 떠오르는 밤이면 졸음도 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 때문에 나는 나이가 많아지면서 사진을 찍는 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게 된 것 같다. 공장이나 농촌에 나가면 근로자들이나 아녀자들과도 찍고 초소에 나가면 인민군군인들과도 찍는다. 어느 해인가는 연풍고등중학교에 들렸다가 반나절이나 학생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지금은 제도가 좋아서 사람과 직업에 층하가 없고 누구나 공훈을 세우면 영예도 누리고 만 사람의 갈채도 받는다. 그리고 어디에 가나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 노동속에서 솟아나는 춤과 노래가 명절의 광장과 축전무대에 옮겨지고 불야성을 이루는 밤거리와 공원에는 행복한 사람들이 끝없이 흐른다.

반세기 이전에는 이 모든 것이 별처럼 먼 공상이었다. 항일투사들의 태반은 이런 생활을 보지 못한 채 희생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목숨을 바쳐 피로써 열어놓은 역사의 길이 없었더라면 우리 세대의 오늘과 내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